포석정 鮑石亭. 下

눈 내린 경주 남산


비운의 한 서린 포석정에도 봄은 오는가.
견훤의 말발굽에 짓밟혀 피로 물든 지 1천2백년, 영겁의 슬픔이 겨울나무 가지에 맺힌 꽃멍울처럼 서럽다. 화랑의 북소리 땅을 치며 통곡하던 그 날, 환락의 술잔은 피를 부르고 천년사직은 무릎을 꿇었다. 군주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서라벌의 영화는 눈물도 말라버린 유상곡수 돌확 물길 따라 어른거리는데 언제까지 이 비운의 현장을 가슴 저미는 눈길로 바라보아야만 하는가.

포석정을 한갓 유희의 장소로만 보는 오해의 시각은 아직도 많다. 그런데 그런 부정적 시각이 안개처럼 걷히고 있다. 참 다행스런 일이다. 포석정에 대한 베일이 조금씩 벗겨지고 있는 것은 화랑세기(花郞世記)의 필사본이 발견되고 포석정 주변 발굴조사가 이뤄지면서부터다. 화랑세기 필사본은 아직 그 진위가 밝혀지지 않은, 말 그대로 원본을 베껴 쓴 책이다.

▶김대문의 화랑세기를 주목한다

화랑세기는 통일신라시대 김대문(金大問)이 화랑들의 연대를 기록한 역사서이다.
하지만 삼국사기에 그 내용 일부가 인용되어 있어 그런 역사서가 있었다는 것만 전해왔을 뿐 실체는 없다. 만약 화랑세기가 존재한다면 삼국사기(1145년), 삼국유사(1276)를 4~5백년이나 훌쩍 뛰어 넘어 그것도 당대의 사가가 쓴 한민족 최고의 역사서가 될 것이다.

김대문은 704년 성덕왕 3년 한산주 총관(漢山州 摠管)을 지내면서 고승전(高僧傳), 악본(樂本), 한산기(漢山記), 계림잡전 (鷄林雜傳)을 저술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오늘날 어느 것 하나도 전해오는 것은 없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 현명한 재상과 충성스런 신하가 여기서 솟아 나오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졸이 이로 말미암아 생겨났다” 는 등의 내용은 화랑세기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그런 점 때문에 『화랑세기』 라는 책이 존재했다는 사실만 전해오고 있을 뿐이다.

화랑세기의 진본은 아직 그 실체가 밝혀지지 않았지만 필사본 두 권이 근대 들어 발견됨으로써 ‘우리의 고대사를 새로 써야 한다’고 할 정도로 거센 논란이 일었다.
이 두 권의 필사본은 일제 강점기 일본 궁내청 서릉부 촉탁으로 있던 박창화(1889~1962)라는 재야 사학자가 남긴 것이다. 박창화는 1934년부터 12년간 서릉부에 근무했는데 이 때 조선총독부가 반출해 간 우리의 문화재급 도서 가운데 화랑세기가 있는 것을 보고 이를 베껴 썼다고 한다. 이 필사본이 지난 89년과 95년 두 차례에 걸쳐 유족들이 세상에 내 놓음으로써 1천3백년 만에 빛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사학계에선 “위작이다”, “아니다” 를 놓고 지금까지 그 진위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화랑세기 필사본의 가치

진위여부를 떠나 화랑세기 필사본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가 전하지 못한 고대사를 많이 담고 있어 주목된다.
화랑세기 필사본이 발견되면서 신라상고사는 물론 포석정 연구에 획기적인 발판이 되었다.
필사본은 서기 540년부터 681년 사이 화랑도의 우두머리였던 풍월주 32명에 대한 전기와 남녀관계, 근친혼, 동성애, 다부제등의 내용을 주로 담고 있다. 특히 당시 궁중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섹슈얼리즘은 가히 충격적이다.

화랑세기 필사본에 따르면 저자 김대문은 4세 화랑인 이화랑의 후손이다. 이화랑의 큰 아들은 원광법사이고 둘째 아들은 12세 화랑 보리이다. 김대문은 보리의 아들 예원의 손자인데 예원의 동생 보룡(寶龍)은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의 모친이다.

1세 위화랑(魏花郞), 2세 미진부공(未珍夫公), 3세 모랑(毛郞), 4세 이화랑(二花郞), 5세 사다함(斯多含), 6세 세종(世宗), 7세 설원랑(薛花郞), 8세 문노(文努), 9세 비보랑(秘宝郞), 10세 미생랑(美生郞), 11세 하종(夏宗), 12세 보리공(菩利公), 13세 용춘공(龍春公), 14세 호림공(虎林公), 15세 유신공(庾信公), 16세 보종공(宝宗公), 17세 염장공(廉長公), 18세 춘추공(春秋公), 19세 흠순공(欽純公), 20세 예원공(禮元公), 21세 선품공(善品公), 22세 양도공(良圖公), 23세 군관공(軍官公), 24세 천광공(天光公), 25세 춘장공(春長公), 26세 진공(眞功), 27세 흠돌(欽突), 28세 오기공(吳起公), 29세 원선공(元宣公), 30세 천관(天官), 31세 흠언(欽言), 32세 신공(信功)
-화랑세기 필사본에 기록된 화랑 풍월주 세보.

▶제사 집행자에서 출발

화랑은 고대 신궁에서 하늘에 제사하던 의식에서 비롯되었다. 집행자는 처음엔 여성이었으나 후에 남성으로 바뀌면서 화랑이 되었다. 그리고 낭도를 거느리고 산천을 떠돌며 수련 연마하는 제도가 되었다. 낭도를 준군사적 조직으로 만든 것은 사다함의 검술 스승이며 진평왕 때 8세 화랑이 된 문노 였다. 그리고 신라가 국가의 체제로 정비 되던 시기의 관습과 왕실의 계층 분화, 모권의 역할 변동, 사회계층간의 대립, 신라 골품제의 진골 정통성 등에 절대적 영향을 미친 제도였다.

바람이 분다고 하되 / 임 앞에 불지 말고 / 물결이 친다고 하되 / 임 앞에 치지 말고 / 어서 어서 돌아오라 / 다시 만나 안고 보고 / 아흐, 임이여 / 잡은 손을 차마 물리라뇨.
-풍랑가 (風浪歌), 미실.

화랑세기 필사본


화랑세기 필사본에 실려 있는 이 풍랑가는 미실(美室. 원화라고도 함)이 전장에 나가는 연인 사다함을 위해 지었다. 만약 이 향가가 화랑세기 진본에 실려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처용가 보다 훨씬 앞선 시대의 우리나라 최고의 향가가 된다.

여기 등장하는 미실은 현대의 극작가나 소설가들이 극중 성적 모티브로 삼을 만큼 매우 흥미로운 인물이다.
미실은 제 2세 풍월주 미진부와 법흥왕의 후궁 묘도부인 사이에 난 미도(媚道.방중술)와 가무를 전문 교육받은 여인이다. 24대 진흥왕, 25대 진지왕, 26대 진평왕에 걸쳐 색공(色供. 몸을 바치는 여인)이었으며 5세 풍월주 사다함과 정을 통하고 6세 풍월주 세종과 결혼한 뒤 7세 풍월주 설화랑과는 연인 사이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진흥왕과 그의 아들 동륜 금륜과도 관계를 맺었으며 늘 왕 곁에서 정사에 참여하며 권력을 쥐락펴락 했다.

학계에선 이런 내용들이 너무도 작위적이고 소설적이라며 이 필사본이 진짜 화랑세기를 보고 베껴 쓴 것인지 아니면 창작된 것인지를 두고 논쟁이 끊이질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위작이라고 고개를 돌리기엔 공감되는 부분이 많다. 앞으로 진본이 나타날 때 까지 사학계가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아 있는 셈이다.


▶포석정에 대한 오해 재조명

필사본에는 포석정이 포석사(鮑石祀) 또는 포사(鮑祀) 라는 이름으로 여러 곳에 등장하고 있다. 제사를 지내는 시설 즉 사당이라는 사(祀) 자를 쓴 것으로 볼 때, 술 마시며 흥청대는 그런 향락 가무장소가 아니라 신성한 사당터 즉 샤머니즘의 성소였음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내용을 뒷받침 할 과학적 증거들이 하나씩 나타나고 있는 것도 주목되고 있다. 포석정 발굴조사가 그 한 예가 된다. 경주문화재 연구소는 98년 포석정 주변 조사에서 포석 (砲石)이라고 새겨진 명문 기와조각과 제사용으로 추정되는 토기등을 발굴했다. 줄무늬와 특히 사선무늬가 있는 기와는 통일신라시대 이전 7세기 삼국시대의 것으로 이 일대에 이러한 기와를 사용한 건물이 이미 조성되어 있었던 것임을 확인했다.

이런 고고학적 발굴성과와 화랑세기 필사본의 내용들이 상당히 일치는 것으로 볼 때 필사본의 진위여부와 포석정의 건립연대, 포석정에 대한 오해 등의 여러 문제들이 새롭게 재조명되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마치 짙은 안개 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우리의 고대사와 사학계의 끊임없는 논란 문제는 우리의 역사를 강탈해 간 일본의 양심에 따라 쉽게 풀릴 수 있다. 일제 강점기 우리의 문화재급 도서가 일본으로 반출된 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한국해외전적조사연구회 조사기록에 따르면 일본으로 반출된 도서가 일본 궁내청 서릉부에만, 1차 조사 6백39종 4천 6백78책과 2차 조사 5종 13책이 소장돼 있다.

일본은 2010년 한일 강제 병합 100주년을 맞아 조선왕실의궤 등 1천2백5점의 도서를 반환했다. 그러나 이 도서는 조선총독부를 통해 반출된 것들로 전체 반출도서 가운데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문화재청이 조사한 일본 내 한국문화재는 6만점 개인소장까지 합치면 30만점이 넘을 것으로 보고 있다. 화랑세기 진본이 소장돼 있다는 서릉부의 빗장은 아직도 굳게 닫혀 있다. 그 존재여부마저 확인하기 어려운 문화침탈자들의 소행이 개탄스러울 뿐이다.

다시 찾은 포석정에서 상념에 젖어있는 필자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봐야

이같은 여러 정황으로 볼 때 포석정은 단순한 유희의 장소만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견훤이 서라벌에 쳐들어 온 때가 11월 겨울이었고, 그것도 10여리 밖 지금의 건천 일대까지 진격해 진을 치고 있었는데 아무리 주색에 탐닉한 왕이라 하더라도 그 추운 한겨울에 연회를 베풀고 궁녀들과 정신없이 놀아날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포석정은 화랑도의 숭고한 정신이 깃든, 나라의 운명을 기원하는 신성한 제사장이었다” 는 새로운 시각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어둡고 비통한 역사에 가려 차갑게 얼어붙었던 포석정, 서라벌의 봄날이 다시 와서 그날의 꽃들이 다시 피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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