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운동장을 가득 메운 인파가 단상을 응시하며 연사가 나오기를 기다린다. 추첨으로 순서를 정한 후보자들이 차례로 연단 앞에 서면 평소 그를 지지하던 청중이 환성을 지른다. 연사는 미리 준비한 원고는 머릿속에서 사라지고 자신도 모르게 초입부터 우렁찬 일성을 내뱉는다.

“사랑하고 사랑하는 우리 동네 유권자 여러분!”
합법적으로 청중을 한 곳에 모아놓고 선거에 나선 후보자들이 차례로 유세를 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 날은 마치 축제 같아서 어르신들은 누가 이끌지 않아도 정장에 두루마기까지 꺼내 입고는 시간도 되기 전에 유세장으로 행차하곤 했다. 그 곳에 가면 동네에서 말깨나 하는 사람은 다 만날 수 있었다. 운동장 한 귀퉁이에 선거관리위원회에서 마련한 자리가 있어 목도 축이면서 그 날 등장할 후보자에 대한 검증이 미리부터 시작되곤 했다.

2000년대 초반까지 그러니까 지방자치제도가 부활한 뒤 처음 지방선거에서도 합동유세는 살아 있었다. 백미는 1970~90년대 국회의원 선거였다. 양산과 김해를 지역구로 두 명의 국회의원을 뽑았던 중선거구제도가 폐지되고 개정된 헌법에 따라 1988년 제 13대 국회의원선거가 실시됐다. 민정당의 나오연, 민주당의 김동주 두 후보자간 대결이었는데 김동주 후보가 2천표 차의 신승을 거두고 재선에 성공했다. 민정당의 노태우 대통령이 당선된 지 4개월 만에 치러지는 선거라 여당인 민정당 후보가 유리한 형국이었으나 결과는 달랐다.

당시는 지금의 부산시 기장군이 양산군 소속으로 있을 때였다. 기장, 일광, 장안 등 바닷가 지역에서 표차를 크게 벌린 김동주 후보가 기세를 끝까지 이어 갔는데, 기장 출신 이점을 유감없이 발휘한 결과 김동주 의원의 유세를 기억하는 사람이 많았다. 행정고시 출신에다 재무부 관료로 관세청장까지 지낸 고위 공무원 출신 나오연 후보보다 내공은 깊다 할 수 없었지만 대중을 사로잡는 연설 하나로 지지를 끌어냈다는 평가가 많았다. 지금과는 시대적 상황이 많이 다르지만 당시는 감성에 호소하는 읍소 전략이 충분히 위력을 발휘했다고 볼 수 있다.

요즘은 사라졌지만 지방선거 초기만 해도 학교 운동장에서 운집한 청중을 대상으로 사자후를 터뜨리는 장면을 지켜볼 수 있었다. 중장년층이면 향수를 느낄 만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때를 회상하면 수 차례 낙선하기는 했지만 박인 전 도의원을 떠올리게 된다. 합동유세에서 청중의 관심을 끄는 유창한 연설로 인기를 몰았는데 불행히도 득표까지는 연결하지 못해 번번이 낙선의 고배를 들었다. 20대 후반부터 줄기차게 정치 현장에 모습을 드러낸 그는 국회의원 선거는 물론, 시의원, 도의원, 시장 선거까지 안 나가본 선거가 없을 정도다. 당선은 딱 두 번, 시의원 보궐선거에서 한 번, 도의원 선거에서 한 번 당선돼 뱃지를 달았다.

그러고 보면 연설 잘 한다고 꼭 당선된다는 보장은 없는 듯 하다. 지난 몇 번의 국회의원선거에서 진보진영의 유력주자였던 송인배 전 청와대 부속실장은 다섯 번의 도전을 모두 실패로 장식했는데, 매번 선거 연설이나 토론에서 대부분 우위를 점했기에 아쉬움은 더 클 것 같다. 현재 재선의원인 자유한국당의 윤영석 의원이나 더불어민주당의 서형수 의원은 달변으로 평가되지는 않는다. 정치입문도 오래 되지 않고 공직이나 언론사 대표가 이력이니 대중연설 경험이 많을 수는 없을 것이다.

역대 시장들의 대중연설 솜씨를 비교해 보면 큰 차이가 나지는 않는다. 굳이 따져 본다면, 안종길 전 시장과 작고한 오근섭 전 시장 모두 처음부터 연설을 잘 하지는 않았다. 시장으로서 경륜이 쌓이면서 연설 솜씨도 오른 경우다. 이런 면에서 나동연 전 시장도 크게 다르지 않다. 처음 시장에 당선되었을 때보다는 시간이 가면서 크게 나아진 경우로 볼 수 있다. 이에 비하면 김일권 시장은 타고난 언변으로 평가받았다. 어떤 자리에 가더라도 원고없이 상황에 맞는 연설이 가능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연설 잘 한다고 꼭 이긴다는 보장이 없기는 국회의원선거와 다를 바 없었다. 김 시장은 나동연 전 시장과 세 번 맞붙어 두 번 패한 뒤 마지막에 설욕에 성공했다.

이런저런 사정에도 지금의 정견 발표 방법은 아쉬운 점이 많다. 조그만 트럭에 올라 소형 메가폰을 들고 목청을 돋구려니 제대로 감정 표현이 쉽지 않다. 너른 장소에서 운집한 청중 앞에서 사자후를 터뜨리는 것을 보았던 올드 팬들은 아쉬움이 많을 수 밖에 없다. ‘선거는 축제’라는 구호가 아니더라도 여러 후보들을 한 자리에 불러모아 이것저것 비교해 보는 재미가 쏠쏠했는데 이젠 흘러간 추억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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