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리 그리운 것이 많은가. 고향 하늘을 쳐다만 봐도, 옛일을 생각만 해도 가슴이 싸하다. 산다는 건 과거의 그림에 덧칠하며 미래라는 밑그림에 채색하는 것인가. 그래서 시인이 이 하루를 잘 가꾸라 했는가.
삶이 그대를 놀리듯 해도 / 슬퍼하거나 노여워 말라
슬픈 날을 참고 견뎌라 / 기쁜 날이 곧 뒤따라온다네
현재는 언제나 답답하고 /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모두가 지나가는 순간 / 지나면 뒤돌아보고 싶다네
<알렉산드로 푸쉬킨의 시 7연 중 2연, 중의역>
고향의 추억으로 가설극장을 빠뜨릴 수 없다. 1980년대 초까지 시골은 극장과 멀었고 TV 보급률도 낮았다. 우리 지역에 전기가 들어온 것이 1970년대 중반이고 전화가 교환방식에서 자동식으로 대중화된 해가 1983년이니 문화 전파가 좀 늦은 편이다.
그러나 연극, 영화, 가요 콩쿠르를 몰랐던 건 아니다. 순회하는 유랑극단과 가설극장 그리고 가요콩쿨이 있었다. 작지만 만화방도 들어와 반딧불이처럼 아이들을 공상의 세계로 날아다니게 하였다.
유랑극단의 공연은 1960년대까지 있었는데, 마을의 공터나 마당이 너른 집을 빌려 포장을 치고 그 안에 무대를 꾸며 공연을 했다. 그 내용으로는 독립운동, 사극, 이수일과 심순애 등이었다. 이런 연극을 보고서 청년들이 비슷한 대본을 만들어 마을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다. 마을행사라 세련된 분장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성심껏 준비해 이를 발표하는 날이면 온 동네는 장날처럼 들뜬다. 연극이 끝나도 ‘누구 집 아무의 연기가 엉망이더라’며 한동안 얘깃거리가 되고 이러한 공감대로 이웃과 이웃, 가슴과 가슴이 더욱 가까워졌다.
앞집 누나와 한 담 새 뒷집 형이 연애하게 된 것도 연극 배역 때문임을 열 살인 나도 눈치챘다. 장수프로인 전국노래자랑보다는 작지만 면민가요콩쿨과 마을 가요콩쿨대회가 1970년대까지 1년에 한두 차례 화려하게 열렸다. 장소는 주로 널따란 공터였으며 마을 단위 콩쿨은 터가 너른 집을 빌렸다. 입장료를 안 받으니 포장을 칠 일이 없다.
주최하는 청년들로서는 구경꾼이 북적거려야 돈을 내는 노래 신청이 많기 때문이다. 기타를 치는 사람 한둘이나 손풍금이 추가되어 반주를 하고 심사는 초등학교 선생님이나 음악에 소질이 있는 두어 사람에게 맡겼다. 주최자나 사회자 모두 제 좋아서 하니 돈 들 일이 별로 없었다. 단골상품은 당시로는 신제품인 대야, 양동이, 백철솥, 냄비로 무대 한쪽에 진열되어 번쩍이고 있었다.
한창 유행하던 한명숙의 ‘노란 샤쓰의 사나이’를 어느 누나가 부르는데 초반부 ‘노오란 샤쓰 입은 말없는 그 사람이 어쩐지 나는 좋아’에서 ‘땡’이 울렸는데 엉겁결에 ‘어쩐지 나는 좋아’를 ‘땡해도 나는 좋아’하며 노래를 이어가 한바탕 웃음판이 벌어지기도 했다.
시골 사람도 문화욕구가 없을 수 없어 가설극장이 들어왔다. 경제원론을 빌리면 수요에 따른 공급이다. 어른들은 영화라는 말 보다 활동사진이라 불렀다.1980년대 초까지 가설극장이 1년에 두어 번 들어와 4~5일 머물렀다. 장소는 주로 하천변인데 어른들은 하천을 갱빈이라 했다. 가설극장이 열리면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모래톱과 자갈이 말간 그 갱빈에 모여들었다.
선전반에서 차에 확성기를 달고서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면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금번에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영화, 김지미 최무룡 주연 ‘외나무 다리’를 상영하오니 기대하시고 고대하시기 바랍니다”하며 떠들고 다니니 귓바퀴에 여운이 맴돌아 가지 않고는 배길 수 없다. 장년 구경꾼도 제법 있었고 청춘남녀들은 영화 보러 가는지 청춘사업 하러 가는지 저마다 발걸음이 가벼웠다.
여남은 살 우리들은 돈이 있을 리 만무하나 쪼르르 뒤따라 나선다. 마이크 소리가 크게 들리고 마을 사람들이 나가는 낌새를 보면 좀이 쑤셔 집에 있을 수가 없었다. 어쩌다 형이 입장료라도 한푼 주면 그날은 재수 좋은 날이나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도 있어 아이들은 자연히 불청객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열 살이면 호기심이 한창인데 그 푸대접이 못내 섭섭했다.
아이들은 마이크 소리가 나고 전깃불로 대낮같이 환한 그곳으로 누가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바삐 걸었다. 호롱불만 보다가 자가발저닝지만 전등불 아래에 서면 별천지였다. 먼저는 전깃불 밑에서 구경꾼을 구경하는 재미로 눈이 휘둥거레진다. 그 가운데 이웃 마을 동급생과 마주치면 싱긋 눈인사로 반겼다.
그래도 주목적은 영화 구경이다. 영화 포스터의 그림 만으로 10대의 궁금증을 재울 수 없었다. 사실 마을 형과 누나들을 뒤따라 나올 때는 꿍꿍이가 있었다. 우리끼리 틈을 노리다가 가설극장 광목 포장 밑으로 숨어들려는 속셈이다. 물론 여의치 않으면 영사기 필름을 갈아 끼울 때까지 기다린다. 귀는 포장 안 대사 목소리에 두고도 눈망울은 별빛이었다.
본영화가 반쯤 돌아가면 감시가 뜸하거나 아예 출입구를 열어 놓았다. 그런데 도저히 그때까지 기다릴 수 없는게 문제였다. ‘대한 늬우스’와 예고편이 끝날 때쯤 ‘면민 여러분 기다리고 고대하던 본영화가 상영됩니다’라는 방송이 나오면아이들은 더욱 초조해진다. 오줌을 누는 척, 감시하는 사람을 지켜보다가 한눈파는 게 보이면 족제비처럼 후다닥 포장 밑으로 숨어든다.다행히 붙잡히지 않으면 돈 주고 입장한 사람들 새에 파고들어 영화에 빠져든다.
나도 한 번 붙잡혀, 매표소 입구에서 두 손을 들고서 고개를 잔뜩 숙이고 벌을 섰다. 한 번은 지키는 억센 손과 겨우 0.1초 차이로 그 38선 포장을 넘긴 넘었는데 검정고무신 한 짝이 벗겨져 바깥에 떨어졌다. 그러나 체면이라는 생사가 걸려 그 볼모를 그냥 두고서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우리 2~3인조 중 동작이 느린 누구는 서너 번 붙잡혔는데 그런 날은 사선을 넘나든 동지라 영화 보는 재미가 바람 든 무 같았으며, 또 다른 나는 동무 곁을 맴돌았다.
영사기가 낡아 스크린에 줄이 나타나거나 화면이 끊길 때가 종종 있었다. 그때마다 어른들 따라 ‘내 돈 내놓아라, 온돈 받고서 뭐하는 짓이고’를 덩달아 외쳤다. 도둑 구경꾼인 주제에 큰소리쳤으니 ‘내 보따리 내놓아라’는 봉이 김선달이 유가 아니었다.
나는 아널드 토인비의 주장처럼 역사는 거시적 관점에서 발전한다고 보지마는 문화는 꼭 그렇지 않다고 본다. 문명이 계속 발전한다고들 하나 퇴보도 있다. 요즘도 일류 디자이너들이 박물관에 가서 본뜨거나 영감을 얻는다지 않는가. 그 전시품은 자연을 본뜬 것일 테고, 즉석식품이 판을 치고 기계와 잘들 노는 이 시대의 음식문화와 놀이문화를 발전이라 할 수 있을까. 오죽하면 참살이란 말을 쓰는가.
다들 새로운 것과 편리한 것만 찾는데 소박하고 은근한 고전미가 새로이 다가온다. 고향의 옛 풍습과 좀 원시적인 그 생활상들이 어머니 품처럼 무척이나 그립다.
별이 총총한 밤하늘을 이고서 영화와 놀던 추억, 눈에 선한 그 광경이 일생이라는 활동사진 가운데 명장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