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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진의 영화산책] 2차대전 말 히틀러의 일대 반격
   
발지 대전투 (Battle Of The Bulge, 1965)


‘전투는 이겼으나 전쟁에는 졌다’ 1944년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히틀러의 마지막 발악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

한때 유럽 전부를 손아귀에 넣고 1차대전의 패배로 감수한 베르사이유 조약의 빚을 일거에 갚고도 남는 위용을 떨쳤던 나찌 독일은 미국의 참전으로 기세가 오른 연합군의 최후의 일격인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여파로 서서히 패배의 길을 걷게 된다. 국가 지도자이자 군의 총수로서 히틀러는 회심의 일전을 구상하고 실행에 옮기는데 적진 한복판으로 모든 기갑병력을 집중시켜 한방을 노린다.

어느 나라에서나 실제 벌어졌던 역사적 사건에 대한 해석과 평가는 디양하게 도출되기 마련이다. 또한 진정한 역사적 평가는 아주 긴 세월이 지난 후 역사가들만이 아닌 평범한 대중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도 진리에 가깝다.

6년 이상 세계를 공포와 비극으로 이끌었던 제2차 세계대전이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자, 전쟁 기간 중 일어났던 숱한 전투와 작전, 비밀계획 들이 멋지게 포장되어 외부로 드러나곤 했다. 심지어는 실패로 끝난 작전마저도 부분적인 이득을 획득한 전과를 과시하기에 이르렀다. 그 와중에 나찌 독일군의 위대한 지휘관과 용맹스러운 활약은 묻히고 만다. 역사는 승자의 몫이라 할까.

발지 대전투의 발지(Bulge)는 지명이나 사람 이름이 아니다. “불룩하게 튀어 나온 것, 주머니”의 의미인 발지를 전투 이름에 붙인 것은 이유가 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일거에 전세를 뒤엎은 연합군이 독일로 진군하는 병력의 보급로를 확보해 나찌의 목을 조으려고 시도한 대규모 공수작전인 “마켓가든 작전”이 참혹한 실패로 돌아가자, 히틀러는 절호의 기회로 생각하고 최정예 기갑부대를 앞세워 일대 반격을 노린다.

1944년 겨울을 기점으로 벨기에 삼림지대인 아르덴 숲에 탱크부대를 집결시켜 방심한 연합군을 섬멸한다는 이 계획은 일견 성공한 듯 보였지만 히틀러가 기대한 회심의 대반전을 이루지 못하고 연료와 보급 부족으로 궤멸하고 만다. 결국 이 전투는 나찌 패망의 마지막 도화선이 된다. “마켓가든 작전”은 1977년에 제작된 영화 <머나먼 다리>에서 사실적으로 다룬 바 있다.

영화의 플롯은 한 방향만 보여주지는 않는다. 탱크부대의 활약 뒤에는 영어를 구사하는 독일군들로 구성된 후방교란부대가 미군 차량을 탈취해 적진 깊숙이 들어가 혼란을 야기하는 장면들이 나온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오토 스코르체니 친위대 중령이 이끄는 제 150기갑여단이 미군의 군복을 착용하고 영어를 구사하는 병사들이 노획한 연합군의 차량과 연합군의 것으로 위장한 차량을 사용하여 적 후방지역에 침입했다. 실제 완벽하게 영어로 이야기할 수 있고, 그곳에서 태어나서 후방 지역에 침투하는 것이 가능한 이는 20여 명 정도였지만 이런 부대의 존재는 그 행동 이상의 혼란을 발생시켰다”다고 “그라이프 작전”을 설명하는데 실제로 존재했다는 이야기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연합군 정보장교 역에 헨리 폰다가 캐스팅된 것은 의미심장하다. 미국영화계에서 헨리 폰다는 일종의 안티 히어로다. 딸 제인 폰다는 1960~70년대 반전운동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영화는 발지 전투에서 연합군의 무용담을 다룬 전쟁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독일 기갑부대장 역으로 나온 로버트 쇼의 카리스마가 더 빛난다. 말하자면 어느 한 쪽의 시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균등한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이기에 2차 대전 당시 연합군 총사령관이었다가 미국 대통령이 된 아이젠하워로서는 불편한 심경일 수 밖에 없었다. 1965년 12월 2일자 워싱턴 포스트지의 기사에 따르면,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워너 브라더스의 이 영화로 크게 노했다고 한다.

기사는 또, 콜롬비아 영화사가 아이젠하워나 몽고메리 장군 등 관련된 많은 장성들 뿐만 아니라 국방성과도 잘 협조하여 발지 전투에 대한 서사영화 계획을 갖고 있었다고 했다. 콜롬비아 영화사의 영화는 <12월 16일; 발지 전투(16th of December: The Battle of the Bulge)>로, 마이클 앤더슨이 감독을 맡았는데 대통령의 아들 존 아이젠하워도 전투사에 대한 집필과 기술 고문으로 참여했다.

앤더슨 감독은 아이젠하워 역에 반 헤플린, 영국군 사령관 몬고메리에 데이빗 니븐, 미군 소장 패튼에 존 웨인, 히틀러에 로렌스 올리비에를 원했다고 한다.

1964년 겨울 동안 촬영에 들어갈 거라는 콜롬비아사의 발표가 있은 직후, 워너 브라더스사는 자신들의 픽션 영화를 "The Battle of the Bulge"라는 제목으로 독자적으로 제작하겠다고 발표해 콜롬비아사의 전기영화 계획을 틀어지게 만들었다.

콜롬비아사는 자신들에게 제공된 실제 인물들, 예를 들면 아이젠하워, 몬고메리, 오마 브래들리, 패튼 등 10개의 다른 인물들의 이름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가처분을 받아냈다. 국방부도 연방상거래위원회에 그 영화의 제목이 대중을 잘못 이끌 수 있다고 제재해 줄 것을 권고했다.

1966년 가을, 그 안건이 상정되었을 때 콜롬비아사의 프로젝트가 뉴욕 워터타운 인근의 캠프 드럼에서 촬영에 들어간다는 발표가 나왔다. 하지만 이내 프로젝트는 좌초되었으며, 다시는 제작되지 못했다. 어용영화 제작이 실패로 돌아간 것이다.

로버트 쇼는 독일 전차부대장 역으로 당시 그로서는 최고인 35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그는 이 영화 말고도 <스팅, 1973>과 <조스, 1975> 등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겼는데, 뛰어난 연기와 카리스마에 불구하고 술을 너무 좋아하는 바람에 1978년 51세의 나이에 유명을 달리했다. 이런 말을 남기고, "나는 술을 많이 마십니다. 술을 안 마시는 위대한 배우가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알려주시겠소?"
 

그레이 장군은 부하 정보장교인 카일리 중령의 정세보고를 신뢰한다 (스틸컷 IMDB 제공)

박성진 편집국장  ocarita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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