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시절 남편은 부산에 살면서도 양산으로 다니는 데이트를 고집했었다.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을 때라 버스를 몇 번을 갈아타고서야 통도사에 도착했던 기억과 폭포가 근사했던 홍룡사, 오르내리는 내내 주변 경관이 아름다웠던 내원사를 알아갔었다.

세월이 한참 지나서야 알게 된 것은 내게 불교의 가르침을 알려주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시어머님과 함께 생활하는 나를 대견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남편의 지혜를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불교의 가르침으로 부모에 대한 도리와 인간사 순리를 깨닫게 조금이나마 깨닫게 된 나는 아무런 잡음 없이 시어머님과 서로 의지하며 잘 지낼 수 있었다. 또한, 불교에서 말하는 인연에 대한 믿음 때문인지 몰라도 사람이나 환경, 진리와의 관계를 형성할 때면 나도 모르게 인연이라는 말을 자주 쓰곤 한다.

내가 불교에 대해 초발심을 갖고 살면서도 나름의 삶의 방식을 갖추게 된 것은 한참의 시간이 지나서였다. 자식이 성장하는 만큼 결정의 순간은 많아졌었고, 곤혹스런 환경에 처하면서 더 많은 것을 깨달아야 할 순간들이 많았었다.

수많은 환경 속에서 나와 맞는 사람과 적절한 인연을 선택하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배울 수 있는 지혜와 버려야하는 인연을 알았기에 삶의 방식을 갖추는 것이 가능했는지 모른다.

인연은 사람과 사람사이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무언가를 하고자 할 때 선택해야할 부류나 사람, 환경 등 모든 것을 어떻게 선택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할 줄 아는 힘과 어떤 마음으로 먼저 다가가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상생하고자 할 때 오는 인연, 살아가며 깨달음을 얻기 위해 필사적일 때 오는 인연, 이 모든 것들이 그냥 내게 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알아차려야 한다는 것이다.

17년 전 양산을 선택해서 이사를 감행했을 때도, 5년 전 늦은 대학생활을 시작했을 때도, 몇해 전 합창을 시작하게 됐을 때도 스스로 선택한 인연이라 할 수 있다. 크게는 삶의 방식이 바뀌었고, 직면한 환경이 달라지면서 싫든 좋든 만나야 했던 인연들... 그 인연속의 수많은 가지와 같은 선택의 순간들이 관점을 바꾸고 작게는 나의 태도와 습관을 바꾸게 했다.

지금도 다른 모양 다른 색깔로 인연은 계속 채워지고 이어져가고 있다. 내가 선택한 인연을 통해 이어지는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나 자신을 채워나갈 것이다.

수많은 선택의 순간에 우리의 인연은 만들어질 수도 배제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어른이 되어 관계를 형성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환경과 관점까지도 같이 수용하는 것이라 더 신중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신중하게 선택했더라도 항상 옳을 수는 없다. 원하지 않은 소용돌이 같은 모진 인연을 만나면 빨리 빠져나와야 할 때도 있는 것이다. 잘못된 인연은 우리의 삶을 뒤흔들 때도 있다. 그럼 우리는 인연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결국 자신의 수행이 없으면 소중한 인연이 와도 알아차리지 못하기 때문에 놓칠 수 있음을 깨닫는 것이 더 중요한지도 모른다. 작은 경험으로 큰 결실을 얻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런 요행은 자주 오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어떤 환경과 논리에 맞닥뜨려도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자신에 대한 준비가 되었다면 이제는 사심 없이 인연을 맺어보자. 예전과 달리 나와 다른 관점을 여유로움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내가 인연을 선택하는데 있어 더 큰 힘이 되어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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