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포석정(鮑石亭) 上

포석정 가던 날 눈이 내렸다. 남녘에서는 보기 드문 눈이다. 일기예보는 계속해서 폭설을 예보하고 있었다. 미지의 세계로 가는 시간여행은 느리게 달리는 기차를 타기로 했다. 부전역에서 동해남부선을 탔다, 손 내밀면 잡힐 듯 스쳐가는 창밖의 나무와 산과 들 느리게 사라지는 것들은 모두가 풍경이 되었다.
경주역 대합실에서 데라구찌 히사꼬상과 조우했다. 그 옆에서 다소곳이 일본식 인사를 하는 중년의 여자와 함께. 이들은 나와 반대방향에서 왔다. 히사꼬상은 대구에 사는 일본인으로 하이쿠 시를 쓰는 여류시인, 나와는 문학 동인이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60대의 시인은 오래전부터 “경주고적답사 때 꼭 한번 동참하고 싶다” 고 했다. 필자도 글을 쓰면서 가끔씩 일어 번역을 부탁하는 신세, 마침 이날이 조금이라도 신세를 덜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택시는 우리 일행을 포석정 인근 한식당에 데려다 주었다. 점심때가 지나서인지 궁중식 맛이 더 좋았다. 매표소로 들어서는데 눈이 눈을 가렸다. 능을 지키는 석상들도 나무들도 묵묵히 눈앞에 서 있었다. 우리는 눈길을 걸으면서 카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과 니가타의 밤을 이야기했다.

포석정 앞에 말을 세울 때 / 생각에 잠겨 옛일을 돌이켜 보네 / 유상곡수 하던 터는 아직 남았건만 / 취한 춤 미친 노래 부르던 일은 이미 옳지 못하네 // 함부로 음탕하고 어찌 나라가 망하지 않을 쏜 가 / 강개한 심정을 어찌 견딜까 / 가며가며 오릉의 길 읊조리며 지나노니 / 금성의 돌무지가 모두 떨어져버렸네.
- 서거정의 십이영가중에서-

▶ 헌강왕이 신과 함께 추었다는 춤

어무상심무(御舞祥審舞). 헌강왕이 포석정에서 추웠다는 신의 춤, 환락의 술잔이 돌고 돌아갔다는 포석정에 다다랐을 땐 마치 왕이 신과 함께 도포자락을 휘날리며 훠이훠이 춤을 추는 듯 눈발이 날렸다.

포석정은 신라의 지배계급이 계곡의 맑은 물을 끌어들여 곡수(曲水)를 만들고 그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워 일상일영 (술 한 잔에 시 한 수 읊기) 하면서 정치와 국사에 지친 마음을 달래던 휴식공간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시회(詩會)는 중국에서 전래됐다.

중국에는 은, 주, 한에 이르기 까지 3월 3일 상사일 (上巳日)에 관리들이 백성들과 동쪽 물가에 나가 목욕하고 재앙을 막고 축복을 기원하는 유상곡수의 풍습이 있었다. 시객 (詩客)들은 지필묵을 앞에 놓고 곡수에 둘러 앉아 시를 지었다. 술잔이 자기 앞에 오는 동안 시 한수를 짓지 못하면 술 3잔을 벌주로 마셔야 했다.

유상곡수연은 왕휘지가 쓴 난정회기 (蘭亭會記)에 나오는 말이다.
난정회기는 서기 353년 중국의 절강성 란정이란 정자에서 왕휘지를 비롯한 명사 41인이 개울물에 목욕하고 그 뜻을 하늘에 알린 뒤 시를 지었다. 이 시를 책으로 묶으면서 왕휘지가 서문을 썼다. 그것이 유명한 난정회기다.

말하자면 오늘날의 동인지 성격. 이러한 곡수연은 일본에도 전해져 신사나 정원 같은 곳에 노천 개방형 곡수유적이 여러 곳 남아 있다. 근년 들어 일본의 나라시 헤이죠쿄 궁적지에서도 7세기 때의 곡수유적이 발견돼 일본학계가 흥분하기도 했다.
 

▶ 사적 제1호로 세계문화유산 등재

포석정은 궁 밖 별궁의 하나인 이궁원지인 것으로 전해 오고 있다. 이궁원은 임금이 궁밖으로 행차했을 때 잠시 쉬어 가는 곳. 그러나 지금은 건물은 없어지고 마른 전복 포어(鮑魚) 모양의 석구만 남아 있다. 폭이 약 35㎝. 깊이 평균 26㎝. 전체길이 약 10m이다.

포석정은 사적 제1호로 경주남산 서쪽 포석계곡에 자리하고 있다. 통일신라시대 축조된 것으로 지금은 경주역사유적지구에 포함되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10여 년 전 경주문화재 연구소가 포석정 모형을 만들기 위해 이곳을 발굴조사 하던 중 포석(砲石)이라고 새겨진 기와조각을 발견했다. 엄격히 말하면 포(鮑) 와 포(砲) 두 글자는 다르다.

그러나 발굴단 측에서는 “기와를 만드는 사람들이 약자화 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아무튼 이 문자기와가 발견됨으로써 이 기와를 사용했던 건물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신라왕조 멸망의 슬픈 그림자가 드리워진 포석정과 관련해 비교적 기록에 잘 남아있는 왕으로는 49대 헌강왕과 55대 경애왕이 있다.

태평성대를 누리던 헌강왕(875 즉위, 치세 11년)과 마지막 국운 앞에 등불처럼 흔들리다 비운에 간 경애왕(924년 즉위, 치세 2년) 까지 불과 38년 동안 임금이 6번이나 바뀌었다. 신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았다는 것을 말해 주는 대목이다.

중 일연은 삼국유사 처용랑과 망해사조에서 헌강왕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헌강왕 때에는 서울로 부터 지방에 이르기까지 집과 담장이 연 이었고 초가는 하나도 없었다. 음악과 노래가 길에 끊이지 않았고 바람과 비는 사철 순조로웠다. 하루는 헌강왕이 포석정에 갔을 때 남산의 신이 왕 앞에 나타나 춤을 추었는데 좌우의 신하들에겐 그 신이 보이지 않고 왕 혼자만 그 신을 볼 수 있었다 . 왕은 그 신이 추는 춤을 그대로 따라 추웠는데 신하들은 신의 춤은 보지 못하고 왕이 추는 춤만 보게 되었다”.

이때 왕앞에 나타나 춤을 춘 신의 이름이 상심(祥審)이라 해서 사람들은 이 춤을 상심무, 또는 산신무라 했다. 임금이 추웠다고 해서 어무상심무(御舞祥審舞), 어무산신무(御舞山神舞)라고도 했다. 이 춤은 고려시대까지 전해 내려 왔다.

 

▶ 삼국유사 처용랑에 처음 나오는 포석정

포석정에 관한 기록은 삼국유사 처용랑과 망해사조에 처음 등장한다. 이런 점을 들어 헌강왕 이전 통일신라시대 때 이미 축조된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동경 밝은 달에 / 밤드리 노닐다가 // 들어와 자리 보니 / 다리가 넷이어라
둘은 내 것이 런만 / 둘은 뉘 것인고 // 본디 내 것이다 만 / 빼앗긴 걸 어찌 하릿고.
- 처용가, 양주동의 현대역 .

이 향가의 주인공 처용의 이야기도 삼국유사 처용랑 망해사(處容郞望海寺)조에 전해오는 헌강왕 때의 일이다.
“헌강왕이 개운포(開雲浦.울산) 에 나가 물가에서 쉬고 있는데 동해 용왕이 조화를 부렸다. 왕이 신하에게 용을 위해 절을 지으라고 명하자 조화를 멈춘 용은 왕 앞에 나와 인사했다. 그때 용왕의 일곱 아들 중 1명이 왕을 따라와 정사를 보좌했는데 그의 이름이 처용이었다. 왕은 그의 마음을 잡아두기 위해 미녀를 아내로 맺어주고 급간(級干) 벼슬을 내렸다.

처용의 아내는 매우 아름다워 역신(疫神)이 사모했다. 역신은 사람으로 변해 처용이 없는 밤 그의 아내를 찾아와 동침했다. 처용이 돌아와 보니 아내의 잠자리에 두 사람이 누워 있었다. 이때 처용은 처용가를 지어 부르며 춤을 추었다.

그러자 역신은 모습을 드러내 무릎을 꿇고 "제가 공의 아내를 사모해 오늘 밤 범했습니다. 그런데도 공은 성난 기색을 보이지 않으니 참으로 감복했습니다. 맹세하건대 이후로는 공의 모습을 그린 화상만 보아도 그 문 안에는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며 사라졌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문간에 처용의 얼굴을 그려 붙여 사귀 (邪鬼)를 물리치고 경복(慶福)을 맞아들였다”. - 삼국유사

이러한 고사들을 볼 때 아마 헌강왕은 어느 왕보다 신과 교감하는 통치자였던 것 같다.
 

▶견훤에게 붙잡혀 자결한 경애왕

그렇다면 나라를 환락의 독에 빠지게 했다는 경애왕은 어떤 왕이었는가. 경애왕의 통치기간은 즉위 924년부터 견훤에게 붙잡혀 자결한 927년까지 2년여에 불과하다.

이 짧은 통치기간 동안 북에서는 후고구려가 서쪽에서는 후백제가 그들의 세력을 활발하게 확장하고 있었다. 이미 국운은 기울어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원성이 날로 높아가고 도처에 도적떼가 창궐했다.

삼국유사 경애왕조에는 경애왕이 즉위한 갑신년 2월19일 황룡사에서 백 좌를 열어 불경을 풀이했다. 이 때 선승 3백 명에게 음식을 내리고 대왕이 친히 향을 피워 불공을 드렸다. 이것이 백좌를 설립한 선교의 시초였다.

천성(天成) 2년 (927) 9월, 견훤이 침략해 와 고려 태조에게 구원을 청했다. 태조는 부하 장수에게 군사 1만 명으로 신라를 구하게 했으나 견훤은 구원병이 미쳐 이르기 전 그해 겨울 11월에 신라 서울로 쳐들어 왔다. 이때 왕은 비빈 종척들과 포석정에서 잔치에 빠져 있었다. 왕과 비는 후궁으로 피신했고 사로잡힌 사녀들은 노비가 되기를 빌었다.

견훤은 재물을 약탈하고 왕궁까지 차지했다. 왕은 후궁에 숨어있다 붙잡혔다. 견훤은 군중(軍中)으로 끌려온 왕에게 스스로 자결하게 하고 왕비를 욕보였다. 부하들도 왕의 빈첩들을 욕보였다. 그리고는 왕의 족제인 김부를 왕으로 삼았다. 김부는 전왕의 시체를 서당에 안치하고 여러 신하들과 통곡했다. 이때 태조는 사신을 보내 조상했다.

여기 등장하는 김부는 신라 마지막 임금 경순왕이다. 경순왕은 이미 국운이 기운 나라를 고려태조에게 넘겼다. 이때 울분을 참지 못하고 금강산으로 들어간 마의태자가 그의 첫째 아들이다. 경순왕은 비가 있었지만 태조의 딸 낙랑공주를 새 왕비로 맞아 들인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포석정이 신라 왕실의 향락이 꽃피던 연회장으로만 알았다. 그러다가 통일신라 때의 저술가 김대문(金大問)의 화랑세기가 근래 필사본으로 발견되면서 많은 오해가 있었음을 알게 된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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