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수 정치학박사의 중국이란 코끼리 다루기] 왜 코끼리인가

▶ 우리는 코끼리를 잘 다루어야 하는 운명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3단계 방법을 아십니까. 1단계, 냉장고 문을 연다. 2단계, 코끼리를 냉장고에 집어넣는다. 3단계, 냉장고 문을 닫는다.

 40년 전에 유행했던 유머입니다. 요즈음 용어로 썰렁 개그입니다만, 당시엔 무슨 대단한 발상이나 되는 듯 깔깔거리며 주워섬겼습니다. 상상력이 붙으면서 다양한 버전의 시리즈가 이어지기도 했지요. 한 마디로 난센스이고 싱거운 소리지만, 갑갑한 군사 정부 시절을 풍자하는 뜻이 있었습니다. 정치적인 암울함과 사회문화적 답답함을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외는 것으로 해소하던 대목의 소심한 저항이었습니다.

중국 이야기 연재를 시작하면서 먼저 ‘Latte is a Horse' 류(類)의 코끼리 냉장고 넣기 유머를 다시 떠올린 이유가 뭘까요. 우리에게 갑갑한 느낌을 주고 있는 중국의 최근 여러 모습 때문입니다. 중국의 이런저런 행태가 저는 매우 불편하고 불안합니다. 그런 느낌이 들지 않으십니까.
중국이 오랜 도광양회에서 벗어나 기지개를 켜며 불어난 근육을 드러낸 건 2002년부터입니다. 2010년에는 일본을 제치고 경제 규모 세계 2위를 기록하면서 본격적으로 힘 자랑과 돈 자랑을 하고 있습니다. 대국굴기(大國崛起) 즉 우뚝 일어선 위세가 워낙 거칠어서 여러 나라가 피해를 봐왔습니다. 급기야는 ‘차이나 리스크’ 또는 ‘달라이 라마 효과’란 용어까지 생길 지경이 되었지요.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를 구실로 우리에게 몇 년째 외교적 압박과 경제적 보복을 가하고 있는 것도 그런 차원의 일입니다. 치졸하고 험악하기가 과연 글로벌 넘버 투의 나라인가 싶을 정도로 심합니다. 그런 중국을 보면 머리는 아직 여물지 않았는데 근육은 불어나 어쩔 줄 모르는 청소년 같은 형국입니다. 길들지 못한 코끼리 같다고나 할까요.

하지만 울근불근 근육 자랑을 한다고 해서 그게 중국의 전모는 아닙니다. 지금 불안 증세를 보이고 주변을 불편하게 만들고는 있지만, 중국은 하나의 모습으로 단정할 그렇게 녹록한 나라가 아닙니다. 중국은 다층적이고 복잡합니다. 움직이지 않을 때는 태산처럼 있지만 한번 움직이면 지난 세기 혁명을 두 번이나 했을 정도로 벽력처럼 움직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전통과 현재가 3천 년 동안 생생히 연결되어 있는 세계 유일의 나라이기도 합니다. 공맹(孔孟)과 노장(老莊)을 비롯한 오랜 사상들이 지금도 여전히 아주 구체적으로 발언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그런 모습은 덩치 크고 지혜로운 코끼리 같습니다.

인도에 이런 속담이 있답니다. “코끼리 두 마리가 사랑을 나누든 싸움질을 하든 죽어나는 건 풀밭이다.” 가히 상상이 가는 장면이고, 한국을 둘러싸고 미국과 중국이 벌이고 있는 각축에 비견해도 충분한 속담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이래저래 코끼리를 잘 다루어야 하는 운명입니다. 코끼리를 잘 다루려면 그 속성을 제대로 이해하는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 속성들을 하나씩 파헤쳐보려 합니다. 이제 독자 여러분들과 함께 코끼리 다루기 작업을 시작해보겠습니다.

▶ 중국 사람은 비단장수 왕서방인가

우선 고전적인 질문 하나 드립니다. 중국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가 무엇인가요.

저는 뭐니 뭐니 해도 ‘비단장수 왕서방’이 먼저 생각납니다. 퉁퉁하고 비위 좋게 생겼으며 어딘지 음흉한 구석도 있어 보이는 그런 모습의 남자 말입니다. 하지만 왕서방 하면 퉁이 크고 한번 인연을 맺었으면 대를 이어 의리를 지키는 다소 먹물기가 있는 그런 모습도 겹칩니다.

그런데 저보다 왕서방을 훨씬 낫게 봐준 경우도 있더군요. 1930년대 말 김정구 선생이 노래했던 ‘왕서방 연서’란 노래가 바로 그건데요, 가사가 기막힙니다. 왕서방에 대한 정보가 확실합니다. 직업과 취향이 아주 사실적으로 드러나 있는데, 이렇게 시작됩니다. “비단이 장수 왕서방 명월이한테 반해서 띵호와 띵호와.” 곡조도 쿵작쿵작 아주 경쾌하지요. 그런데 이 유행가엔 왕서방으로 대표되는 중국 사람의 경제관과 인생관이 절묘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왕서방 직업이 뭐라구요? 예, 비단장사입니다. 이 노래가 유행하던 당시 실크를 다루는 무역업은 부가가치가 상당히 높지 않았겠습니까. 일단 왕서방은 이재에 밝고 부유합니다.

취향이라고 할까요, 기호라고 할까요. 아니면 가치관 또는 인생관이라고 할까요. 왕서방이 뭘 좋아한다구요? 예, 명월이입니다. 그냥 적당히 좋아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이어지는 가사는 이렇습니다. “비단이 팔아 모은 돈 명월이한테 다 줬어. 명월이 하고 살아서 왕서방 죽어도 괜찮아.”입니다. 사랑에 목숨을 거는 대단한 순애보 아닙니까.

이 대목은 중국 연구자들이 보기에도 놀랄 정도로 탁발한 통찰입니다. 중국인들의 인생관은 ‘음식남녀(飮食男女)’란 한마디로 축약할 수도 있는데요, 이 말은 삶은 먹고 마시고 그리고 사랑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느냐는 매우 현세적인 태도를 표현한 겁니다.

공자도 “덕(德) 좋아하기를 색(色) 좋아하듯 하는 사람을 여태 본 적이 없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색은 기본적으로 남녀관계이고, 나아가 사람의 본능적인 욕망 전체를 말합니다. 덕이란 본능을 이기고 자기 몸과 마음을 다스려가는 지난한 공부 과정입니다. 본능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덕은 애써 기르고 닦는 것이지요. 당연히 덕 좋아하는 사람보다 색 좋아하는 사람이 더 많은 것이 세상 이치 아니겠습니까. 공자가 유학이라는 매력적인 학문 체계와 생활 태도의 비조가 된 비결은 이처럼 평범한 남녀의 감정과 욕망에 대한 공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사상은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정신에 기초한 이상성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소박하고 인간적이었지요. 한 걸음 한 걸음 힘들지만 “죽어서야 끝나는” 일상의 고뇌를 마다하지 않겠다는 자세를 견지했습니다.

『시경』의 한 구절입니다. “전전긍긍, 마치 깊은 물웅덩이에 가 있는 듯하며, 살얼음 위를 걷는 듯하다.” 과연 인생이란 그런 것이던가요. 이렇듯 아찔아찔한 삶에서 음식남녀에 충실한 왕서방 모습이 대견하다고 해야 하는 겁니까. 그가 『시경』과 『논어』를 진지하게 읽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 중국의 다층적인 모습

중국하면 왕서방 말고 또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십니까.

짜장면입니까? 쏼라쏼라 하며 요란하게 몰려다니는 요우커(遊客)입니까. 담장을 훌쩍 뛰어 넘고 대나무 가지 끝에 서서 무공을 겨루는 협객 영화입니까. 무릉도원 같은 장자졔(張家界)나 산수화 같은 구이린(桂林)인가요. 베이징 근교의 만리장성이나 시안(西安)의 병마용입니까. 아니면 홍콩의 대규모 시위를 강경진압하면서도 안절부절 못하는 중국 지도부입니까. 이도저도 아니면, 중국은 크다 또는 중국인은 더럽다 또는 속을 알 수 없다 같은 느낌입니까.

누구나 자신의 경험에 따라 각기 다른 이미지를 떠올리실 겁니다. 한중 수교 28년째이니 그동안 얼마나 많은 분들이 중국 유학이나 여행을 다녀오셨겠습니까. 한창 때에 비하면 현저히 감소했지만 여전히 많은 기업이 중국 현지에서 비즈니스를 하고 있습니다. 베이징 상하이 칭다오 등지에는 ‘코리안 타운’까지 형성하고 있지요.

현재 한국 대학에 유학 중인 중국 학생이 7만 명이 넘고, 조선족을 포함한 장기 체류 중국인이 75만 명이나 됩니다. 전체 장기 체류 외국인의 45%에 해당하는 숫자입니다. 지금은 좀 줄었지만 한때 연 8백만 명의 중국 관광객이 명동과 서귀포를 휩쓸고 다녔을 정도로 한중 교류는 활발합니다.

그리고 꼭 중국 현지를 다녀오지 않아도 이미지는 얼마든지 생성될 수 있습니다. 원래 서울에 가서 남대문을 보고 온 사람보다 서울을 가보지 않은 사람이 남대문에 대해 더 잘 아는 법 아니겠습니까. 세상에 가장 무서운 사람이 남대문에 가보지 않았지만 부득부득 우겨대는 사람입니다. 도저히 이길 수가 없지요.

그 다음으로 무서운 사람은 3박 4일 여행 다녀온 사람입니다. 상하이를 다녀왔으면 상하이가 바로 중국이고, 화산을 다녀왔으면 화산이 곧 중국이며, 시안을 다녀왔으면 중국은 시안밖에 없는 게 됩니다. 크고 넓고 다층적인 중국이 한 손바닥 안에 다 들어가 있는 겁니다. 이렇게 중국을 천리안으로 훤히 아시는 분들에겐 당할 재간이 없습니다.

하지만 중국을 오래 연구할수록 중국을 깊이 공부할수록 ‘겸손한 불가지론’의 태도를 갖게 됩니다. 왜냐면 중국은 코끼리 같기 때문이지요. 어디를 만지느냐 어느 시대를 더듬느냐에 따라 내용과 느낌이 크게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중국과 중국인에 대한 나름의 이미지를 갖고 있지만 전모를 파악하긴 어렵습니다.

모르면 모르는 대로 알면 아는 대로 난해한 게 중국 사람이고 중국이란 나라입니다. 저는 그 이유를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하겠습니다. 우선, 깊고 넓은 전통과 관련 있습니다. 다음, 사회주의 시장경제란 세계사적 실험을 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척박한 생존 환경이란 역사적 지리적 배경도 한 이유가 됩니다.

중국의 체제는 사회주의 시장경제입니다. 정치적으로는 공산당의 일당 독재,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 시장 체제라는 뜻입니다. 공산당의 개발 독재이지요. 정치학에선 권위주의 체제라는 표현도 씁니다. 그런데 중국의 현실을 사회주의라는 틀로만 파악하면 반만 보는 겁니다. 왜냐하면 중국은 사회주의와 전통주의가 묘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마오쩌둥 시대를 지나 덩샤오핑, 자오쯔양, 장쩌민, 후진타오 그리고 시진핑에 이르기까지 중국은 시종 전통주의와 사회주의가 절묘하게 배합되어 있습니다.

마이클 필즈베리는 “중국인들은 21세기를 살고 있지만 그들의 전략적 사고는 2천 5백 년 전 전국시대의 약육강식 프레임에 머물러 있다.”고 했는데, 상당히 설득력 있는 주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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