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흔히 “비정상”과 부도덕의 죄악을 혼용한다.

애당초 정상이 무엇인지 정확히 정의한 적도 없지만 “정상은 좋은 것이고 비정상은 나쁜 것이며 나쁜 것은 고쳐야 한다”는 이미지는 우리 머릿속에서 강력히 각인돼 있다. 그러나 사회적 개념의 구분만 제대로 해도 세상의 많은 나쁜 현상은 사라지기 마련이다.

질병이라는 관점에서 보든 장애라는 관점에서 보든 “아픈 것은 부도덕도 죄악도 아니다. 그러나 마치 아픈 것을 ”나쁜 것 “취급하며 무조건 나아야만 하는 것으로 보고 오지랖을 부리거나 무례하게 구는 사람이 많다.

남의 건강을 걱정하는 것도 도를 넘으면 실례다. 아픈 것은 나쁜 것이 아니다. 아픈 상태에서 나아지려고 노력하는 것도 장애로 차별받지 않고 살아가려는 것도 전적으로 당사자 본인 이 결정할 문제다. 누군가 암에 걸리면 사람들은 그가 암을 치료하거나 최소한 삶을 연장하려고 고군분투해야하며 암을 이겨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항암을 선택하는 것은 온전히 당사자 몫이다. 치료가 싫다면 치료를 거부할 권리도 그에게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치료를 받고 싶어 하고 조금 더 살고 싶어 하지만 대부분 그렇다는 것이다. 그 어떤 병원도 암 환자에게 강제로 항암제를 투여하고 강제로 입원 시키지 않는다.

애당초 일부러 아프고 싶은 사람은 없다. 일부러 장애를 가지고 싶어 하는 사람도 없다. 우리 모두는 “비정상”이 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아프게 살고 싶지 않고 치유되고 싶어 한다.

장애 역시 사회의 구성물이다. 나에게 어떤 손상이 생겼을 때 사회차원의 반응이 존재 할 것이고 이 반응은 각자 개인에게 무능력을 주게 된다. 이를테면 휠체어를 탄 장애인은 계단이 많은 건물에서 곤란을 겪는데 이 계단은 본디 자연스러운 것이라기보다 장애가 없는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 제공된 환경이다. 그로 인해 장애인은 이동할 수 없는 무능력을 갖는다. 평평한 이동 경로가 존재 했다면 아마 장애는 무능력으로 기능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주 낮은 시력이라서 안경을 쓰는 사람은 요즘 흔하지만 안경이 발명되기 이전에는 장애인이었을 것이다.

장애는 극복해야 하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 우리는 흔히 장애를 “비정상”과 동일한 것으로 받아드리고 정상상태로 만들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리곤 한다. 그러나 장애는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이 아니다.
 

이호형
시인, 사회복지사, 심리상담사
경남지체장애인협회양산시지회부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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