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행복하기를 원하고 행복을 추구하고 살아간다. 행복을 어디에서 찾을까. 자기 생활 주변에서 감사거리를 찾는데 있다. 감사거리를 찾으려면 매사에 은혜를 발견하는 눈을 떠야 한다. 사실 감사는 모든 조건이 다 갖추어져 있을 때 보다 어려움을 겪어가는 과정에서 크게 깨달을 때가 많다.

원불교를 창시하신 소태산 대종사님께서는, “세상 만사가 다 내 뜻대로 만족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짓고 천만년의 영화를 누리려는 사람같이 어리석은 사람이다. 지혜 있는 사람은 십분의 육만 뜻에 맞으면 만족하고 감사를 느끼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하십니다.

보통사람들은 자기 뜻에 합당하면 감사하고 합당치 못하면 원망하고 있으면 감사하고 없으면 원망하고 병들었다가 나으면 감사하고 또 아프면 원망하고 변덕이 많다. 경계따라 변덕이 많은 사람은 감사는 순간이고 원망은 길다. 때때로 있어지는 이러한 경계들은 어디에서 왔는가 생각해 보라.

현실이라는 지금 이 순간 내 앞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재수 없게 어쩌다 생겨난 일이 아니다. 우연이나 숙명적으로 생겨난 일도 아니며, 그 어떤 절대자가 나를 시험해 보기 위해 만들어 낸 것 또한 아니다. 내 앞에 펼쳐진 모든 경계는 모두가 내가 만들어 낸 환영일 뿐이다. 잠시 분별심 내어 만들어 낸 거짓된 신기루이며 한바탕 꿈일 뿐이다. 인연 따라 잠시 생기고 인연이 다하면 자연스레 사라지는 것이다. 그렇기에 일체는 다 공(空)하다 하는 것이다. 일체는 다 인연 따라 생하는 것이다. 내가 과거에, 그리고 전생에 지어 온 일체의 모든 행위들이 원인의 씨앗이 되어 때가 되면 무르익어 열매가 열리듯 그렇게 때맞춰 과보를 가져오는 것일 뿐이다. 누가 인연 지어 주는 것이 아니다. 내가 짓고 내가 받는 것이다.쉽게 내 뱉었던 말 한마디, 머리 굴려 쥐어 짜낸 생각 하나 하나, 아무 생각 없이 한 행동 하나 하나가 0.1%의 에누리도 없이 우리의 현실을 만들어 낸다. 어느 것 하나 우연이 없다. 수 억겁을 윤회하며 우린 참 많은 행위를 일으키며 살아왔고, 수많은 업을 짓고 살아왔다. 지금 우리의 마음속엔 그 오랜 세월동안 지어 온 일체의 모든 업장이 고스란히 다 녹아 있다. 내 앞에 펼쳐진 일체의 모든 경계는 다 이유가 있기에, 원인이 있기에 나온 것이다. 짓지 않은 것은 절대 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안팎의 일체 모든 경계를 다 받아들이는 것이 진정한 공부심이다.내 앞에서 당당해지세요. 있는 그대로 모두를 받아들이고 당당히 싸워 몽땅 녹일 수 있어야 한다. 괴로움의 과보가 왔을 때 싫다고 비켜가면 그만인 듯 하지만 도리어 더 큰 과보가 되어 언젠가 내 앞을 가로막을 것이다. 반드시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 법계의 이치다. 그렇기에 다 받아들이고 그 모든 경계를 다 녹여 내야 한다.우리의 마음은 용광로라고 하지 않던가. 그 어떤 경계일지라도 나의 참 주인공 속에 몰록 놓고 나면 다 녹아들게 되어 있다. 나의 참생명은 무엇이든 다 녹일 수 있는 부처님이시다.

까짓 하늘이 무너진다 해도, 그 어떤 경계가 두려움을 몰고 온다 해도, 묵묵히 관찰하고, 다 놓고, 다 비우고, 다 받아들이라. 그러면 그때부터 진정한 감사가 나온다. 일시적으로 경계 따라서 있어지는 감사가 아니라 언제나 어느 곳에서나 항상 변함없는 감사함으로 가득찬 행복자가 된다. 인생을 현상적인 면에서 보면 고도 있고 낙도 있고, 사랑도 있고 미움도 있고, 득도 있고 실도 있고 흥하기도 하고 망하기도 하고 이에 따라 좋고 나쁨이 없을 수가 없다

그러나 본질적인 면에서 보면 아침 자리에 일어나서 하루를 맞이한 것도 감사하고, 숨을 쉬고 물 한 모금 마시는 것도 감사하고, 밥을 먹는 것도 감사하고, 두 눈을 뜨고 걸어 다니는 것도 감사하고, 밤에 TV를 보는 것도 감사하고, 식구들 하루 무사한 것도 감사하고, 하루를 지내고 잠자리에 드는 것도 감사하고 살아있는 이 자체가 감사하지 않는 것이 없다.

항상 감사하며 살자. 우리 모두에게 공평하게 찾아온 축복의 시간, 평화로운 새해 새날도 감사생활로 늘 행복하시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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