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이태 전인 1590년 일본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파견된 조선통신사 일행 중 정사(正使) 황윤길과 부사(副使) 학봉(鶴峯) 김성일(1538~1593)은 일본 정세에 대해 선조 임금에게 상반된 보고를 하였다. 황윤길은 '반드시 왜군의 침입이 있을 것'이라고 보고하였고, 김성일은 민심이 흉흉할 것을 우려하여 ‘그렇지 않다’고 하였다.

결과적으로 “전쟁은 없을 것”이란 김성일의 상소는 거짓이 됐고 ‘당파의 이익을 위해 거짓 보고를 한 인물’로 역사에 기록되었으며,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파직되었다. 그러나 곧 류성룡의 변호로 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 경상우도 초유사(招諭使)로 임명되었다. 경상도로 내려가 의병장 곽재우를 도와 의병활동을 하며, 의병을 두루 모으고 관군과 의병간의 협력도 도모케 했다. 김성일 초유사의 초유문 일부를 소개한다. 초유사는 난리가 났을 때, 백성을 타일러 경계하는 일을 맡아 하던 임시 벼슬이다.

“성심으로 원하는 바는 이 격문이 이르는 날 수령들은 한 고을을 효유(曉諭 : 알아듣게 타이름)하고 변방의 장수는 사졸을 격려하라. 문무관리와 어른이나 선비들은 서로 전달하라. 그리하여 동지를 불러모아 충의로서 결속하고, 성을 쌓아서 스스로 지키고, 군졸을 거느리고 싸움을 거들어라. 부유한 백성은 군량을 운반하고 군수를 넉넉하게 할 것이요, 용감한 사람은 칼을 뽑아 들고 적의 무리를 무찔러라.”

5월 22일에는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의 초유문(初諭文)을 본 경주 의사 최진립(崔震立)이 격문초(檄文草)를 잡아 소모(召募)하니 연소역강(年少力强)한 지원자가 수백 명에 달했다. 이에 수일이 지난 뒤 의장기를 높이 걸고 운문산신에 기도하고 제사하였다. 이 때 김진(金軫), 이철(李澈), 박경전(朴慶傳), 박형(朴炯), 이경연(李景淵), 이한남(李翰南), 최진립(崔震立), 이의잠(李宜潛), 고처겸(高處謙), 류백춘(柳伯春), 손기양(孫起陽), 이몽란(李夢鸞), 안근(安瑾), 정호인(鄭好仁), 최대기(崔大期), 신전(辛) 등의 의사들이 모여 단상에 올라 사졸(士卒)들을 격려하고 해가 져서야 돌아가 막을 방책을 강구하였다. 양산의 이몽란은 양산, 울산, 경주. 팔공산, 화왕산 전투에도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의병을 이끌고 왜구에 대항하였다.

양산 이씨 종가 고문서는 보물 제1001호로 지정되었다. 이 문서는 양산 이씨의 시조인 이전생의 가선대부공조전서 임명 사령서인 왕지 1점, 징석 관련 문서로 왕지 4점, 장수에게 특권을 부여하는 내용이 담긴 유서 1점, 왕이 신하에게 토지와 노비를 내리는 내용의 사패교지 3점, 징석이 죽은 후 세조임금이 내린 사제문, 징석의 장남 팔동이 받은 교지, 징석의 직계후손인 몽란이 병조에서 발급받은 교첩, 무과에 급제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교지, 이몽란이 임진왜란 때 세운 공을 인정하여 공신으로 인정한다는 내용의 『이몽란선무원종공신록권』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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