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미디어 시대에 위상, 예측하기 어렵지만 성찰 필요
실시간 체크되는 시청률에 비자발적 노동자로 편입

텔레비전은 아빠보다 세다. 우리집 거실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그가 말하면 모든 가족들은 숨죽이며 그에게 빠져든다. 텔레비전이라는 사물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고찰하는 책이 있다. 사회학자 노명우가 쓴 <텔레비전, 또 하나의 가족>이라는 책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텔레비전을 바보상자라고 치부하며 끌 수도 없고 그렇다고 ‘카우치 포테이토’가 돼 마냥 의존만 할 수도 없다. 텔레비전이 쏘는 전파의 일방적 수용자가 되지 않으려면 성찰하고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데 시청자미디어 비평가가 된다든지 하면서. 또 상업적 방송보다는 교양 프로그램을 골라보는 것도 방법이겠다.

무엇보다 텔레비전의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텔레비전의 속성을 알아야 한다. 첫째로 텔레비전은 상업적이다. 우리는 실시간으로 체크되는 시청률을 올려주는 비자발적 노동자가 된다. 그렇게 우리는 광고를 시청하게 되고 정말로 필요해서 구매하는 것이 아니라 그래야 될 것 같아서 구매하게 된다.

이 책의 저자는 사회학자답게 ‘포드주의’로 설명한다. 대량생산 대량소비로 대표되는 포드주의가 텔레비전을 통해 궁극으로 확산된다고나 할까. 포드는 노동자들이 소비자가 되도록 했고 여가시간을 줬다. 결과적으로 똑 같은 상품을 소비하게끔 만들었는데 그 역할의 일등공신이 텔레비전이었다.

우리는 동시에 똑같은 채널의 텔레비전을 보면서 같은 것을 습득하게 된다. 그래서 독일 나치는 모든 가정에 라디오를 가지게 해서 나치즘을 주입시키려고 했다. 매스컴을 장악하려고 국가 권력이 안달하는 것은 현대에도 마찬가지다. 사실 노동자들은 성찰하려 들지 않는다. 고달픈 노동을 위로하는 자극만 있으면 된다. 지배계급도 노동자들이 성찰하게 되는 것을 반기지 않았다. 그래서 산업혁명 초기에 읽기능력은 가르쳤지만 쓰기능력은 가르치지 않았다.

신문과 비교해도 텔레비전의 속성은 명확히 드러난다. 신문을 읽으면 정치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역설적으로 신문을 읽지 않는 시민들이 늘어날수록 정치인들은 쾌재를 부른다. 눈을 부릅뜨고 견제하는 이가 없을테니까 말이다. 역사적으로도 신문은 부르주아들의 정치적 공론장 역할을 했다. 하지만 텔레비전은 다르다. 상업방송이 지배하는 나라에서는 정치는 정치전문가들이 벌이는 ‘쇼’에 불과하다. 채널을 돌려버리면 화려한 가수가 노래하는 모습을 보며 여가를 보낼 수 있다.

쉽게 말하면 텔레비전 홈쇼핑 채널이 나오면 우리집 거실은 마트가 되는 것이다. 최신이라는 이미지를 쓴 텔레비전이 우리를 소비하게 만드는 것이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최신 냉장고를 보고 사고싶은 욕망을 불러일으켜야 소비가 일어난다. 이것을 성찰해야 텔레비전의 노예가 되지 않는다.

저자는 회화가 사진에 살해된 것처럼 뉴미디어의 시대에 텔레비전의 위상이 어떻게 될지는 감히 예측하지 못한다고 했다. 대학 교수나 노동자나 텔레비전을 보며 여가를 보내기는 마찬가지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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