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임진왜란 창의의사 박홍남의 소개에 이어 선무원종공신 1등인 박홍춘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한다.

박홍춘(朴弘春, 1537~1602)은 울산 박씨 말응파에 속하며, 자는 경인(景仁), 호는 학수당(鶴睡當)이다.

이산군수 지변(之?)의 둘째 아들로 양산 용당동(당시 울산군)에서 출생하였다. 1564년(명종 19)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 훈련원주부(訓鍊院主簿)와 감포만호를 거쳐 언양현감, 기장현감을 역임하였다.

현감으로 재직할 때 일을 과감하고 공정하게 처리하는 결단력이 돋보여 백성이 순종하였으며, 현의 아전들이 두려워하여 비리를 저지르지 못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아들 계숙, 조카 계종, 사촌동생 홍남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전공을 세웠다.

1592년 9월 순찰사 한효순과 경상좌병사 박진이 부산 동래와 기장의 적을 막아낼 때 서면장(西面將 : 언양지역의 장수)을 맡아 숱한 전과를 올렸다.

1598년 11월 18일 정유재란 당시 왜적 가토기요마사가 도산성(현재 울산의 학성공원)을 불태우고 왜적이 패주함에 명나라 제독 마귀(麻貴)가 바로 성안에 들어가 잔병을 추격하고 서생포 왜성을 탈취하였다.

박홍춘은 1598년 11월 19일 여러 장수와 함께 서생포 왜성에 모여 창표당(蒼表堂)을 세우고 비를 새겨 역사를 기록하고 잔치를 하여 포고하니 참여한 장수가 43명이었다.

체찰사(體察使) 한음(漢陰) 이덕형이 박홍춘 장군의 활약상을 조정에 보고하여 울산군을 울산도호부로 승격시켰으며, 박홍춘 장군을 다시 통훈대부로 기장현감에 임명하였다.

현감으로 재직하며 백성을 편안하게 다스렸고, 전쟁으로 발생한 유랑민을 보호하였더니 3년 만에 호구가 증가하였으며, 이런 업적은 기장의 치적안에 소상히 실려 있다.

박홍춘 공은 퇴직 후에 거문고를 뜯으며 학문을 연마하였으며, 조정에서 여러 번 불러도 출사하지 않았다. 『창표당안』에 생절(生節) 28원(員)의 일원으로 기록되어 있고, 1605년 4월 선무원종공신 1등으로 책봉되었다.

유품인 장검이 후손의 기증으로 울산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박홍춘 공은 태화강변 오산(鰲山)의 죽림(竹林) 백여경(百餘頃), 말응마을 전답(田畓) 수십결(數十結), 서천연전(西川練箭) 삽십리와 남산 12봉(현재 태화동 앞산)을 사패지로 받았다. 배위는 숙인 의춘 정씨이고 계배위는 경주 이씨로 공의 묘에 부장(附葬) 하였다.

1996년 1월 아들 계숙과 손자 취문에 관한 글과 함께 『학수당삼세실기』가 간행되었고. 울산 박물관에 기증된 유품 환도(環刀)가 2013년 8월 16일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9호로 지정되었다.

2005년 울산 충의사에 배향되었으며, 묘소는 울산광역시 중구 태화동 산26번지에 있다. 양산에서 임진왜란 공신인 박홍남, 박홍춘 공이 태어난 것을 자랑스럽게 여겨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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