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년 만에 정약용(丁若鏞) 선생의 '茶山草堂'을 찾았다.

茶山 정약용 선생에 대해선 세상에 널리 잘 알려진 바 있어서 여러 말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강진(康津) 귤동(橘洞)은 옛 같지가 않았다. 30여년 전만해도 茶山이 귀양살이를 하던 옛 모습과 별로 달라진 게 없었다. 보잘 것 없는 한촌(寒村) 옛 유배지의 모습 그대로이었다.

아늑하고 남향받이 따사로운 햇볕이 내려 쪼이는, 유자나무가 한두 그루 울타리 가에 서 있는 전형적인 전라도 남녘 갯가마을이었다.

이번에는 아니었다.자동차가 마을 깊숙이 草堂 산길 턱밑까지 들어갔다. 차에서 내렸는데, 가슴이 콱 막혔다.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앞을 보아도 옆을 보아도 뒤를 돌아보아도, 고래등 같은 한옥 기와지붕들이 눈을 가로 막았다. 그동안 공룡화한 한국의 상업자본주의가 남녘 한촌 작은 갯가마을을 온통 다 집어삼켜버린 것이다.

이것은 유배지의 마을이 아니었다.찻집이니, 펜션이니, 민박집이니 하여, 귤동을 찾는 답사객들의 주머니를 노리는 숭악한 장사촌이 되고 말았다. 사람들의 생각이 왜 이렇게 타산적이기만 한가?

茶山의 유배지 귤동은 옛 모습 그대로 한촌 그대로여야 한다. 답사객들의 편의시설은 마을 밖이나 외곽지역에 마련해야 하는 것이다. 이건 마을 전체를 통째로 장사촌을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귤동은 茶山草堂의 바탕 그림이다. 茶山草堂이 없는 귤동은 그런대로 남도 갯가 자연 한촌으로서의 의미를 갖지만, 귤동없는 茶山草堂은 어쩐지 그 본래의 의미를 반감(半減)해 버리는 느낌인 것이다. 갯가 외진 한촌이니까 유배마을이 되었고, 마을 뒷산에 소재한 '귀양초막'은 이에 어울리는 꽉 찬 구도의 한 폭의 그림이었던 것이다.

30여년 전에 茶山草堂이 초막(草幕)이 아닌 와가(瓦家)인데서 느꼈던 섭섭함에 비할 바 아닌 허탈한 충격이었다.

산길을 오르는데 그만 오르지 않고 멈춰서 버리고픈 생각이 들었다. 전혀 옛과는 낯선 길이었다. 아늑하고 호젓한 산 이끼 냄새 풍기는 오솔길 그대로가 아니었다. 길을 넓힌다고 어설픈 죽책(竹柵)을 치고 흙을 깎아버렸는데, 이것이 큰 잘못인 것이다.

사람 하나가 나무 사이를 구불구불 오르내리는 자연 산길을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오르내릴 수 있도록 인위적으로 손을 덴데서 탈이 난 것이다. 장마 폭우에 흙이 씻겨내려 돌짝 밭길이 되었고, 큰 나무 뿌리들이 얼기설기 파여 나와 길을 걸을 수가 없게 되었다.

우리나라 관광지나 유적지 어디를 가나 느끼는 바이지만, 관광지의 자연물이나 유적지의 역사 유물들이 갖고 있는 숨은 이야기, 전설, 유래, 역사 사실들과는 무관하게 개발되고 치장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보호하고 더 빛나게 보전하려는 뜻이, 와려 반대로 관광자원을 훼손하고 문화유산이 갖는 가치와 정신적 향기에 누를 끼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소득 수준이 올라감에 따라 지자체의 예산액도 제법 방대해졌다. 이것을 기화로 시, 군, 구의회와 각 지자체들의 예산 씀씀이가 헤퍼지고 있는 것이다. 지자체장들의 생색내기 위한 불요불급한 예산집행과 선거를 의식한 전시행정에 막대한 예산이 낭비되고 있는 것이다.

관광자원을 개발 치장하고 문화유적지를 깨끗하고 아름답게 환경개선을 하는 일을, 나쁜 일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격에 맞게 격조 있게 사업이 이루어져야 한다. 각 지자체장들의 낮고 짧은 안목에 맞추어 국민의 혈세가 헛되이 쓰여 지고 있음이 비일비재한 것이다.

茶山 정약용 선생은 그 나름대로 시대의 아픔을 안고 선진사회, 보다 나은 세상을 꿈꾸며 19년 동안 유배지에서 수많은 저서를 남겼다. 당시로선 새로운 생각, 민중을 다시 보려고 노력을 했다. 피폐했던 조선사회, 강진 귤동은 피폐했던 농촌 갯가 마을이었다. 가난에 찌든 농촌 민중의 땀내 젖은 절박한 삶의 터전이었다.

귤동마을 고샅길은 모두가 아스팔트가 깔려 있었다. 茶山이 살아서 다시 귤동마을을 찾는다면 무슨 말을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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