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없는 바람에도 뜰앞 나뭇잎이 툭툭 진다. 이 무렵이면 그 옛날의 고향집 마당에도 빙그르르 오동나무 잎이 진다. 가을이 마당 안으로 깊숙이 들어올 때면 어머니는 호박오가리를 만들어 추녀 끝에 구불구불 매다셨다. 감을 깎아 추녀 끝에 주렁주렁 매달아놓은 가을 풍경도 아름답지만 호박오가리 풍경도 소박하나마 보기 좋다.

안성에 내려온 김에 호박오가리를 한번 만들어 보고 싶었다. 집 뒤 돌각서리엔 잘 익은 호박들이 꽤 여럿 있다. 올해는 비가 넉넉히 와준 덕에 고추며 토란 대파 무가 잘 자라주었다. 물론 호박도 기대 이상으로 잘 커 주었다.

뒤뜰에 나가 돌각서리에 올라섰다. 바위틈이며 바위 뒤편엔 내 눈에 띄지 않고 큰 호박이 다섯 덩이나 된다. 잘 익은 호박은 보는 것만으로 배부르고 넉넉하고, 뿌듯하다. 세상에 호박을 닮고 싶은 사람이야 있을 리 없겠지만 나는 때로 호박의 후덕함과 무던함, 그리고 한 자리를 꾸준히 지킬 줄 아는 든든함을 닮고 싶을 때가 있다.

호박 심는 일은 재미있다. 예전 아버지 하시는 걸 보면 잘 삭힌 뒷거름을 호박구덩이에 충분히 주고 흙을 덮은 후 사나흘 뒤 호박씨를 심으셨다. 그러고 열흘쯤 지나면 그 냄새 나는 구덩이에서 호박씨는 푸른 봄 깃발을 찾아들고 이 세상으로 달려나왔다.

뒷거름이 없는 나는 지난해에 만들어둔 풀거름과 가게에서 구입한 유기농 거름을 섞은 열 재료를 호박구덩이에 가득 채우고 흙을 덮어 그 위에 호박씨를 넣었다. 그런저런 덕분이겠다. 호박 네 구덩이에서 나온 호박순은 마치 네 발 달린 짐승처럼 온밭을 휘삼고, 돌각서리를 타고 올라 제 영토를 한껏 넓혀 보기좋게 자식들을 낳아놓았다.

"호박오가리는 무슨! 내려왔으면 좀 쉬다 올라가지!"

아내는 쉬지 않는 나를 타박한다. 하지만 호박오가리 만드는 일은 재미있다. 먼저 호박꼭지 부분과 배꼽 부분을 칼로 잘라낸 뒤 숟가락으로 호박 속을 알뜰히 긁어낸다. 그러고 나선형으로 호박을 빙빙 돌려가며 자른 뒤에 들어 올리면 그건 마치 용수철 모습 그대로다.

겉껍질을 깎아 추녀 대신 빨래 건조대에 걸어 볕 잘 드는 곳에 세워두었다. 모두 세 덩이. 볕이 자글자글하고, 사이사이 서늘한 바람이 소르르 불어온다. 오가리가 마르는데 더없이 좋은 가을 날씨다. 어머니가 고향집 추녀에 매어다시던 오가리만은 못해도 건조대에 걸어둔 붉은 빛의 호박오가리도 볼수록 멋있다. 내가 만든 고향의 가을 멋이다.

이렇게 잘 말린 호박오가리는 어디에 쓰느냐? 뭉쉥이를 만드는데 쓴다. 뭉쉥이란 시루떡의 일종인 영동지방 말이다. 시루떡이 시루에 멥쌀가루와 팥고물을 켜켜이 넣고 쪄낸 떡이라면 뭉쉥이는 멥쌀가루와 검은콩 곶감 호박오가리 등을 버무려 쪄낸 떡이다. 마른 호박오가리는 이때에 쓰인다. 눈 내리는 날, 갓쪄낸 뭉쉥이는 언 몸을 녹이는 데 그만이다. 곶감과 호박오가리의 단맛이 콩과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떡의 물씬한 풍미를 나는 잊지 못한다.

텃밭 둘레에 심은 백일홍과 살비아, 맨드라미 꽃씨를 받다가 문득 고개를 든다. 가을볕에 마르는 호박오가리 붉은빛이 참 곱다. 잘 익은 홍시 빛이 저렇고 처마에 깎아 매달아놓은 대봉시 은은한 빛깔이 저렇다. 나는 한동안 붙박힌 듯 서서 내가 만든 가을 풍경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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