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알 수가 없다. '조커' '다크나이트' '어벤져스게임' '반지의 제왕' 등등 이런 환상적이고 비현실적이고 우울하고 거북스럽고 비관적이고, 이런 영화들이 왜 인기가 있는지. 물론 영화라는 것 소설이라는 것이 현실 복사판은 아니겠다.

그리되어서도 안되겠다. 그러나 현실과는 완전히 다른 환상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것, 하나의 관념의 구성체들이 왜 영화산업의 대세가 되고 본질이 되고 특히 허구 구성능력을 갖는 유대인들로 주도되어가는 사회인지 이해할 수 없다.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세상이라는 것이 전혀 상식적이지가 않기에. 재벌이 재벌되는 과정, 권력자의 권력의 형성과정… 진실과 사실과 성실과 진심과 성심과 겸손과 열심… 이런 것들이 아니라 음모 술수 허구 가식 형식 믿음 가치 조직 제도… 이런 것들이 사회의 구성요소들이 되어가니, "내 삶이 비극인 줄 알았더니 코미디였다"는 조커의 대사에 어느 정도 동의가 된다.

권력자 가진 자들은 기타 인간들을 대상화 시킨다. 즉 소재화 시킨다. 나머지 인간들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의 문제로, 어떻게 관리해서 나의 이익과 존재감을 극대화할 것인가에만 초점을 맞추고, 나는 사람 너희는 소재 내지는 물건이 된다. 기업 성장에 도움이 되는 넘인가 아닌가의 기준만이 오직 판단의 근거가 된다. 2017년 드라마 '돈꽃'에서 이순재 회장의 대사다. 사유의 뿌리가 그렇다. 오직 하나의 기준 '돈이 되는 넘인가 아닌가' 사람도 소재로 취급하는 것이 이 지랄같은 왜곡되고 전도된 자본주의 구조 어쩌면 이름하여 천민자본주의 사회의 현실이다.

여하튼 세상을 이해할 수 없다. 허구를 쫓아가는 영화산업, 봉준호 감독 '기생충'이란 영화가 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았는지도 이해하지 못하니 누굴 탓하랴.
이 영화 또한 계층간의 갈등구조로부터 야기되는 다양한 문제들을 사회적 혹은 심리적 관계로 끌어내고 있다 하지만 난장판 칼부림에 참으로 비현실적인 설정들이 어떻게 공감될 수 있는지 아직도 이해되지 않는다.

'조커'란 영화 또한 마찬가지다. 아웃사이드 사회적 낙오자로 자라난 아이가 범죄 후 영웅 취급을 받고 존재감이 인정되고, 급기야 자신을 역이용하려는 언론구조를 향해 총질을 해대는 그런 난장판 사회에 열광하는 영화.

하기야 세상이 그렇긴 한다. 교통비 50원 인상에 세상을 뒤집어야 하는 칠레. 유신의 심장을 쏜 김재규, 그것을 순간포착하여 영원한 군부독재를 만들어가려던 신군부.
작금의 트럼프는 어떻고, 처음에는 그를 헛소리 꾼으로 봤는데, 돈과 자국의 첨예한 이익만이 기준인 국제환경협약에서도 탈퇴. 영구집권하는 러시아와 중국의 현 지도자들은 또 어떻고.
삶의 구조가 원래 이리 부조리한 것이었으니 그 부조리한 구조 위에 서 있는 것이 인간존재의 숙명이라면 이런 영화적 환상도 그것이 부유되는 현실도 이해된다.

그럼에도 그것만이 전부라면 어째 우울해지는 것이 또 기대섞인 체념이겠다. 그래도, 그럼에도 우린 이렇게 생각하며 살기에 희망도 있지 않는가.

환상과 현실사이 절망과 희망사이 썸을 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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