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수는 횃불을 뜻하는 봉(烽)과 연기를 뜻하는 수(燧)를 말하는데, 대략 수십리의 간격으로 바라보고 살피기 좋은 산꼭대기 요지에 봉수대를 설치하여, 밤에는 횃불을 올리고 낮에는 연기를 피워 중앙 또는 변경 기지에 급보를 알리던 통신방법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에 이미 봉수를 나타내는 기록이 보이는데, 특히 수로왕이 다스리던 가락국에서 수로왕7년(서기 48년) 7월 27일에 허 왕후가 타고 오는 배를 보고 횃불을 올렸다는 기록이 나온다.

조선왕조실록 세조실록 32권, 세조 10년(1464년) 2월 15일에 경상도의 창원부 봉산과 계명산의 봉화를 옮길 것을 청하니 따랐다는 내용이 있다. 병조(兵曹)에서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의 관문(關文)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도내(道內)의 창원부(昌原府) 봉산(峯山)과 양산군(梁山郡) 계명산(鷄鳴山)의 봉수(烽燧)는 모두 다 낮고 작아서 먼 곳과는 서로 통하여 바라볼 수 없으니, 청컨대 봉산의 봉화(烽火)는 합산(合山)으로 옮기고, 계명산의 봉화는 위천역(渭川驛) 북산(北山)으로 옮기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위천(渭川) 지역은 동래 지역과 언양 지역을 잇는 중간 지역에 있던 지역으로 봉화산(249m) 밑의 지역이다. 위천은 원적산에서 발원하여 양산천에 합류하는 지류인데, 하천의 명칭이 지역의 명칭으로 쓰이는 것은 일반적이다. 위천산(현재의 봉화산)에는 과거 봉수대 자리였던 위천봉대가 자리하고 있다.

현재는 양산 원적산 봉수대라고 한다. 경남도기념물 제118호로 지정되었으며, 양산시 상북면 석계리 산 20-21에 있다. 원적산 봉수대로 올라가는 길은 석계일반산업단지 조성으로 공단 내부의 도로를 거쳐 올라간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조선 세조 때 만들어진 40여 개의 찰방역 중 하나인 양산 지역의 황산역은 11개의 속역을 두었다. 이 속역은 잉포(仍浦), 노곡(奴谷), 윤산(輪山), 위천(渭川), 덕천(德泉), 굴화(堀火), 간곡(肝谷), 아월(阿月), 소산(蘇山), 휴산(休山), 신명(新明) 등이었다.

『영남역지』의 황산역조 중에 "1857년(철종 8) 수환(水患)으로 황산역을 상북 위천역으로 이전하고 남은 사람들은 황산리에 살았다."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위천역은 황산역 다음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 같다.

위천역은 찰방역인 황산역에 소속된 속역으로 동래 지역과 언양 지역을 잇는 중간 지역에 있던 역이다. 위천역 역사(驛舍)의 위치는 현재의 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석계리 관앞 근처였던 것으로 보고 있다. 위천(渭川) 역은 양산 지역의 다른 역과 마찬가지로 황산역의 부속역인 윤산역과 함께 1895년(고종 32) 역원제가 폐지될 때까지 존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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