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지방 행정체제로 양산(양주)에 향(鄕), 소(所), 부곡(部曲)이 있었다. 『세종실록지리지』 양산군조에는 자기소(磁器所) 하나가 군의 남쪽 금음산리(今音山里)에 있다고 기록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2의 양산군 고적조에는 와곡(瓦谷)·범어(凡魚)·원포(源浦)·범곡(凡谷) 등의 부곡과 어곡소(於谷所) 등 5개가 존재하고 있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범어, 원포, 어곡소는 읍으로부터 각각 서쪽 6리, 30리, 6리에 있고, 와곡과 부곡은 읍으로부터 각각 북쪽 5리, 10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자기소는 도자기를 생산하는 곳이다.

이 중에서 원포부곡을 제외한 다른 곳은 읍에서 그렇게 먼 거리에 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고, 다만 어곡소의 위치는 현재의 물금면(勿禁面) 어곡리(魚谷里)와 동음을 가진 곳이어서 이곳으로 추정된다. 이들 부곡 지역은 『세종실록지리지』에 한 군데의 자기소 외에는 이미 소멸된 것으로 보아, 늦어도 조선 초기 이전에 소멸되어 일반 촌락으로 전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군현 밑에 촌과는 별도로 향(鄕), 소(所), 부곡(部曲) 등의 특수행정조직을 두고 있었다. 촌에는 외관이 파견되지 않고 토착인인 촌장이 자치를 하였으며, 양인 신분의 촌민이 거주하였는데,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는 농민이었다. 촌과는 별도로 부곡을 비롯하여 향과 소라는 특별 행정구역이 있었다. 특수행정구역인 향, 소, 부곡, 장, 처의 형성과 관련된 흥미로운 사료로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이는 여주목의 등신장(登神莊)조가 있다.

신라가 주군(州郡)을 설치할 때에 그 전정(田丁)이나 호구(戶口)가 현(縣)이 될 만하지 못한 것에는 혹은 향(鄕)을 두고 혹은 부곡(部曲)을 설치하여 소재 읍에 속하게 하였다. 고려 때에는 또 소(所)라고 칭하는 것이 있어서 금소(金所), 은소(銀所), 동소(銅所), 철소(鐵所), 사소(絲所), 주소(紬所), 지소(紙所), 와소(瓦所), 탄소(炭所), 염소(鹽所), 묵소(墨所), 곽소(藿所), 자기소(瓷器所), 어량소(魚梁所), 강소(薑所) 등으로 구분되었는데 각기 그 물건을 바쳤다. 또한 처(處) 및 장(莊)이라고 칭하는 것이 있어서 각기 궁전(宮殿)과 사원(寺院) 및 내장택(內莊宅)에 나뉘어 소속하여 그 세(稅)를 바쳤다. 위의 제소(諸所)에는 모두 토성이민(土姓吏民)이 있었다.

향과 부곡이 발생하게 된 연유를 살펴보면, 대체로 전쟁포로의 집단적인 수용이나 또는 본래 군현이었다 하더라도 반역 및 적에의 투항 등 중대한 범죄를 저질렀을 때 강등되어 생겨나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곳의 주민은 일반 군현에 비하여 여러 가지 차별대우를 받은 예가 많이 있었다. 최근 종래의 견해를 비판하고 '부곡인 양인설(部曲人良人說)'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늘어나고 있어 아직 이렇다 할 정설이 없는 실정이다. 그러나 향, 소, 부곡이 특수한 행정조직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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