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하(李遊夏) 양산 군수가 1809년(순조 9) 감영(監營)에 올린 방보장(防報狀)에서 "감동창(甘同倉) 주변의 감동장(甘同場)은 대강수(大江水) 수구(水口)에 있어 강변에 설치한 지가 자못 100년에 가깝도록 오래되었으므로 선박들의 요충지요, 전곡(錢穀)이 모이는 곳이며, 생리(生利)가 조금 넉넉한 고로 사방에서 이(利)를 찾는 생민(生民)들이 해를 거듭하여 모여드니 민호(民戶)의 총수가 무릇 300호요, 군포(軍布)가 나오는 것이 또한 200필이나 되어 단연 동남의 도회이외다."라고 기록하여 당시의 마을 규모를 잘 나타내고 있다.

1878년(고종 15) 편찬한 『양산군 읍지(梁山郡邑誌)』에 따르면, "감동창은 일명 남창(南倉)이라 하는데, 남고(南庫) 3칸(間), 서고(西庫) 3칸, 좌기청 3칸이 설치되어 있었다"라고 한다. 감동창의 위치는 지금의 경부선 구포역 앞 낙동강 둑인 도시 철도 3호선 구포역 부근으로 추정된다. 당시 양산군의 제일 남쪽에 있는 창고란 뜻이 담겨 있다. 오늘날 부산광역시 북구 구포1동 307~328번지, 1060번지 일대의 남창리 마을의 조선 시대 지명은 양산군 좌이면 남창리였다.

감동창은 조선 시대에 나라에 바치는 삼세(三稅) 중의 전세(田稅)와 공물세(貢物稅)인 대동미(大同米) 등을 저장하여 한양으로 조운(漕運)하는 일을 맡아 보는 낙동강의 감동포(甘同浦)에 위치한 조창(漕倉)이었다. 

경상도 각 읍에서 수송된 수천 석의 미곡을 보관하였다. 사인(射人 : 대포나 총, 활 등을 쏘는 사람), 포수(砲手) 등 군사들의 급료미(給料米)를 보관하여 부산지역 군사 진영에 군수미와 포목 등을 공급하기도 하였다. 당시 감동창 일대에는 많은 부민(富民), 호상(豪商)이 거주하였으며, 포구의 상업이 번성하였다. 임진왜란 중반부터 조총을 갖고 투항한 항왜(降倭) 김충선의 부대가 조총 운용을 시작으로 이내 조선 훈련도감이 만들어지면서 포수라는 직업이 생기면서 조총을 다량 보유하게 되었다.

『숙종실록(肅宗實錄)』 권54 숙종 39년 8월 11일 기사에 "또한 금정산성의 서문(西門) 밖은 바로 양산 땅인데 감동창(甘同倉)이 그곳에 있고, 창 밑에 사는 사람이 300여 호(戶)나 되게 많으니[且城之西門外 卽梁山地也 甘同倉在於其處 而倉底居民 多至三百餘戶]"라고 기록되어 있고, 『만기요람(萬機要覽)』 재용편 6 제창 감동창에 "감동창은 양산에 있으니 본래 통·수영과 각 진포의 사포(射砲) 지방(支放 : 봉급)을 위하여 설치한 것이다. 처음에는 연읍(沿邑)의 신미(新米)로 구획하다가 영조 기묘년(1759)에 본 읍의 대동미를 해마다 전부 그 창고에 그대로 두게 하였다. 감동창이 현재는 부산지역이지만 과거에는 양산 땅이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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