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대로는 조선시대 부산 동래와 한양을 연결하는 주요 교통로였다. 조선시대 양산의 물금 지역의 낙동강을 황산강이라 불렀다. 황산강 옆으로 난 길을 따라서 밀양으로 연결되었는데, 이 구간의 다니기에 위험하고 험난한 구간에 개설된 길을 황산잔도라고 하였다.

황산역은 조선 세조 때 만든 40개 찰방역 가운데 하나인데, 11개 속역을 두었다. 황산역 찰방은 현재 물금읍 서부마을에 위치하였다. 세조 이후에는 11개 속역 외에 동래, 언양, 밀양 등지에 16개 역을 관할하였다. 종6품으로 역의 업무를 관할하는 찰방을 비롯해 역리, 역졸, 역노 등 약 8,800여 명이 속해있어 규모가 큰 역이었다. 황산역의 역졸들은 관리들의 이동 편의 제공, 죄수 호송도 담당하였다. 황산역의 귀중한 문화유산을 발굴하여 복원해야 한다.

유배(流配)는 죄인을 귀양보내는 형으로 오형(五刑)의 하나로 조선 시대에는 그 죄의 가볍고 무거움에 따라 원근(遠近)의 등급을 결정하였다. 2천 리, 2천 5백 리, 3천 리 형의 세 종류가 있었으며, 모든 경우에 반드시 장 1백을 더하여 부과했다. 북쪽 끝 함경도 경원부가 1,700리, 남쪽 끝 경상도 동래가 1,000리 정도였으며, 2,000리가 넘는 곳은 제주도 대정현 하나뿐이었다. 조선시대에 잘 알려진 유배길은 삼남대로, 영남대로, 관동대로가 있었다.

이런 먼 거리는 중국 명나라 법전 대명률을 가져왔기 때문인데, 조선에서는 영토의 면적 상 도성에서부터 2천 리 밖으로 유배를 보내는 게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에 거리를 채우기 위해서 일부러 유배길을 여러 지역을 거치는 식으로 빙빙 돌아서 가기도 했다.

유형은 천민부터 양반까지 모두 받는 형이었는데, 신분에 따라 유배 가는 모습도 모두 달랐다. 신분이 낮거나 돈이 없는 천민이나 평민은 걸어서 갔다. 이들을 유배지로 호송하는 임무는 지나가는 역(驛)의 포졸들이 했다. 역과 역을 릴레이식으로 연결해서 죄수를 인계인수하였다. 포졸들은 힘들고 귀찮은 죄수 호송을 빨리 하기 위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유배자를 다음 역까지 이동시키는 경우도 있었다.

귀양을 가면서 나귀 같은 이동수단이나 식비, 의복비 등 개인 편의를 위한 모든 부대비용은 죄수 본인이 부담했다. 문제는 대명률에 따라 유배길이 기본 1,000리에서 3,000리까지 되었기에 오랜 시간이 걸렸다. 신분이 높았던 왕족, 관료 출신, 재산이 많은 사람들은 자비로 편하게 이동하였다. 경제적 여유가 없는 죄수들은 유배지 이동 중 필요 경비를 조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대개 몸으로 때웠다. 명망 높은 고위직 관료의 경우 지방 유력자들이나 자신의 당파 유생들의 도움을 받기도 하였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신분, 재산에 따른 차별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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