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南베트남)은 1973년 월맹(北베트남)과 평화협정을 맺고 주월 미군이 철수했다. 

당시 월남에서 반공을 외치고 나라를 위기에서 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우익인사들은 얼마 후 타살체로 발견됐는데 당시 도보에 따르면 1973년까지 연평균 무려 840여 명이나 암살 당했다. 

월맹 공산군이 남침 총공세를 감행했을 때 반전평화 무드에 젖어 전의를 상실한 월남군대는 싸우지 않고 패주를 거듭하자 주월 미군은 월남에서 철수했다. 

당시 월남은 120만 병력을 가진 세계 4위의 군사강국이었다. 하지만 월맹 공산군에 대한 주적 개념이 없어진 상태에서 그 누구도 월맹 공산군이 남침 총공세를 할 것이라고 믿지 않았고, 그것이 결국 안보를 소홀히 하도록 하면서 패망했다.

그때 대통령 후보자 쭝 딘쥬(Truong Dinh Azu)가 거물급 비밀공산당 프락치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세계를 놀라게 했다. 월남이 패망한 후 통일된 베트남의 상황은 어떠했을까? 제일 먼저 공산화 협조자들이(월남에서 암약한 공산주의자) 공개 처형됐다. 월남의 군인과 경찰은 수용소로 보내졌고, 공무원과 지도층 인사, 언론인, 정치인은 물론, 반정부 반체제 운동을 벌이며, 월남 패망에 앞장섰던 '짠후탄' 신부 등 종교인, 교수, 학생 및 통일운동가들까지 체포되어 수용소로 보내졌거나 처형되는 등 수백만 명이 학살됐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반정부 활동을 하던 인간들은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배신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가장 먼저 처행됐고, 인구와 주택조사, 재산조사, 거주지간 이동금지, 불평불만자, 허가와 사전승인을 무시한자를 처형하고, 1가구 2주택 이상 다주택 소유자 등 재산을 많이 가진 자산자를 가려 처형했다. 어느 국가나 공산화 혁명과정에서는 피할 수 없는 사건은 피의 숙청이다. 공산주의 종주국인 구 소련의 스탈린은 공산혁명을 위해 4,500여만 명을 죽였고, 중국 공산당의 모택동은 대약진운동으로 2,500여만 명, 문화혁명으로 5,000여 만 명을 죽였고, 북한의 김일성은 700만여 명을 죽였다. 

또한 캄보디아의 폴포트는 전체 인구의 ⅓을 죽였고, 쿠바의 카스트로와 체게바라도 수 많은 국민을 학살하였다. 

통일 베트남은 2천만 여 명을 '사회주의정신개조수용소'에 보내 남베트남의 베트콩까지 포함하여 반미친미 월남에서 운동한 좌파 지식인과 종교인들을 한번 배신자는 계속 배신한다는 공산당 기본노선에 따라 이들을 처형했다.

북한 김정일은 생전에 말하기를 "한반도 적화통일이 달성되면 남한의 1천만명은 해외로 탈출하거나 다른 나라로 갈 것이고, 2천만명은 숙청될 것이며, 나머지 2천만명은 자본주의에 물든 자들이라 정신 개조가 불가능하기에 살아남은 남조선 인민 2천만 명을 북한인의 노예로 삼을 것이며, 북한인민 2천만 명만으로 공산국가를 건설할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만약 대한민국이 적화통일 된다면, 한국역사 이래 없었던 대규모 피의 살육이 자행될 것은 자명하다. 이것이 공산주의자들이 행하는 잔인무도한 혁명전술전략이라고 역사는 말한다. 

지난 1975년 월남의 패망과 함께 시작된 베트남 난민의 대탈출은 1980년대 후반까지 10년 이상 계속됐다. 유엔고등판무관실 등이 파악한 난민의 수는 4백만∼5백만명, 이중 1백50만명이 작은 목선에 생명을 맡기고 정처없이 망망대해로 나선 보트피플이다. 

이들은 새로 들어선 공산정부의 학살을 피해 어선이나 소형 돛단배 심지어 고무보트까지 이용, 자유를 찾아 탈출을 감행하면서 당국의 추적을 피해 무조건 넓은 바다로 떠난 난민들은 폭풍우를 만나거나 작은 배에 많은 사람들이 승선한 탓에 배가 침몰, 몰사하는 등 자유를 찾으려던 여정을 비극으로 끝맺기도 했다. 

보트피플은 초기에는 '정치적 난민'으로 취급돼 홍콩, 싱가포르, 한국 등에 정착하거나 미국, 영국, 프랑스 등으로 건너가 비교적 따뜻한 대접을 받았다. 

지금 대한민국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나는 자유 대한민국이 월남(南베트남)의 참극을 반복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하지만 상당히 진행됐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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