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바다와 내륙을 잇는 낙동강 하류의 상업과 교통의 중심지였던 구포나루는 1628년 조창이 설치된 이후 번성하기 시작해 당시 '감동진 나루터'로 불렸다. 일제강점기에는 김해평야 등지에서 생산된 벼들을 구포의 정미소에서 도정해 일본으로 실어 나르는 수탈 기지로 이용된 역사의 현장이었다. 일제강점기와 광복 이후 1950년대까지도 수많은 물자를 실은 배가 드나들었으며, 구포나루가 가장 번성했던 구한말부터 광복 전후까지 나루터 주변과 구포장 일대는 영남 최대의 상권이 형성되어 번영을 구가하였다.

장우석은 1906년 구포사립구명학교의 초대교장을 맡아 인재를 육성하고, 구포지역의 상권을 장악하던 물상객주와 지주들을 끌어들여 구포저축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한일 합방 후 저축회사를 은행으로 개편하여 구포은행을 설립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지난 5월 17일부터 19일까지 열린 제8회 낙동강 구포나루 축제에서 옛 구포장터와 주막거리를 본뜬 감동민속촌과 주막촌에서는 전문배우와 지역주민이 조선 시대 상인과 객주, 주모로 분장해 이색 볼거리를 제공한 바 있다. 축제에 등장한 객주는 무엇인지 알아보기로 한다.

객주(客主)는 상인의 물건을 위탁받아 팔아주거나 매매를 거간하며, 여러 가지 부수 기능을 담당한 중간상인. 보통 물상객주라 하였다. 조선시대에 와서 성황을 이룬 객주는 주된 업무에 따라 여러 종류로 나뉘었다.

객주는 주 업무인 위탁매매 외에 위탁자를 위한 여숙, 금융, 창고, 운송 등 여러 가지의 주선행위, 일부의 부수 또는 전문 업무에 따라서 독립된 업종으로 그 유형이 나누어졌다. 객주는 중간상인으로서, 직접 자신을 위하여 물건을 매매하는 것이 아니고 위탁자와 그 상대방의 사이에서 간접매매를 하는 상인이라는 점에서 우리나라 고유의 상인인 거간(居間)과 같다. 객주는 또한 구전상인(口錢商人)으로서 위탁자를 위하여 매매를 하고 그 대가로 구전만을 받으므로 거간과 같다. 

객주는 주선상인으로 자기 이름으로 위탁자의 계산하에서 매매 위탁물의 거래를 담당하기 때문에 그 행위는 주선이며, 그런 점에서 단순히 거래를 보조하는 거간과 다르다. 객주는 좌상 또는 좌고(坐賈)로 일정한 장소에 영업의 본거지로 영업소를 정하여 좌정하고, 거기에 점포, 상호, 장부 등의 물적 시설을 갖추었다. 규모에 따라 상인을 보조하는 사환, 서기, 차인(差人) 등의 직원을 두었다. 객주의 기원에 관하여는 아직 정설이 없고, 신라 기원설과 고려 기원설, 조선 기원설 등이 있는데, 그 중 고려설이 가장 유력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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