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동면은 높은 산과 깊은 계곡 지형인데도 지명에는 함포(含浦), 내포(內浦), 어영마을이 속한 영포리(泳浦理)를 비롯해 쌍포(雙浦 : 내포와 영포를 합해 부르는 명칭) 등 포(浦)가 붙은 지명이 많다. 이와 관련 아주 옛날 원동천에는 물이 많아 실제로 배가 드나드는 포구였다는 설이 전해온다. 심지어 배내골로 넘어가는 배태고개까지 배가 드나들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영포리는 내포리의 안쪽에 위치하고 배태고개를 사이에 두고 배내골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영포, 어영 두 마을로 형성되어 있다. '양산군 읍지' 국찬(1899)에 어포리(於浦理)로 기록되어 있다. 영포마을은 고기가 놀며 배가 드나드는 포구(浦口)란 뜻으로 어포(魚浦)라 부르다가 하서면이 원동면으로 행정구역이 개편된 후 어영동(魚泳洞)의 영(泳)자와 어포(魚浦)의 포(浦)자를 따서 영포(泳浦)라 하였다.

함포마을 앞의 함포천은 낙동강의 지류로 함포에도 배가 드나들 수 있는 자연환경이었다. 원동의 삼정지마을 동남쪽에서 김해군 상동면 감로리로 넘어가는 감로(甘露) 나루터가 있었다. 이 지명 역시 김해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는 바람에 이런 명칭이 붙은 것으로 유추된다.  

원동천을 따라 내려가면 바로 낙동강에 다다르고 물금, 호포, 구포를 지나 계속 남쪽으로 이동하면 낙동강 하구에 다다른다. 낙동강 하구언이 생기기 전에는 만조시 해수가 낙동강으로 유입돼 밀양 삼랑진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원동천에 배가 올 수 있는 자연스런 조건이었다.

영포리에 있는 신흥사의 벽화 관음삼존도(보물1757호)의 물고기를 들고 있는 어람관음상(魚籃觀音像)도 이곳의 물길이 반영됐다는 해석이 있다. 신흥사 창건 설화 중에 인도에서 석가모니의 제자가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절을 지을 수 있는 목재와 불교용품을 바다에 띄웠는데 그것이 표류하다가 닿으면 인연이 있는 곳이라 하여 절을 지었다고 한다. 그 사찰이 신흥사라는 것이다. 이런 설화와 구전 또한 주변이 포구였다는 것을 뒷받침하고 있다. 

신흥사는 관리들이 닥나무로 종이 만드는 부역을 심하게 시켜 스님들이 견디지 못하고 절을 몰래 떠나자 한때 폐사되기도 했다. 사찰에서는 고려 때부터 자체적으로 종이를 만들어왔다. 사찰에서는 불경을 인쇄하여 책을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목판인쇄술과 함께 제지기술이 발달해 왔다. 또 사찰의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는 한 방법으로 종이를 만들어 시중에 내다 팔았다.

마을 이름을 현재의 자연환경과 결부지어 보면 쉽게 이해가 가지 않지만 과거의 자연스런 낙동강 물길이 살아 있을 때를 연상해보면 포(浦)가 들어가는 지명은 나루터가 있었던 과거를 잘 알려주는 실마리가 된다. 마을 유래판에 이런 설명을 넣어서 스토리텔링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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