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살아가는 데 지켜야할 예절을 도덕(moral)이라고 한다. 법처럼 강제성을 띠진 않지만 그 이상으로 강요되는 경향이 있다. 예를 지키지 않아 뭇사람의 따가운 시선을 받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아주 오래 전부터 있어온 일이다. 사물(존재)의 본질이 미리 결정돼 있다는 서양 철학이나, 인(仁)을 강조한 동양의 유교 사상은 개인의 욕망을 눌러온 근원이다. 서양의 철학자들은 만물을 참과 거짓, 선과 악, 미와 추로 나누고 참(眞)을 가려내는 이성(idea)을 강조해왔고, 동양의 유교 역시도 만물의 씨앗(仁)은 예(禮)라고 하여 삼강오륜을 강조해왔다. 

어디든 사상은 종교나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는 기초가 되었다. 극기와 절제, 금욕을 통한 전체 통합, 이것은 모든 지배담론이 추구한 이상적 질서였다. 삼국시대나 고려, 조선에서도 불교나 유교를 국교로 삼아 삶의 윤리를 강조해왔다는 사실만 떠올려보아도 알 수 있다. 물론 불교의 공(空)이나 노장의 무아(無我)는 지배 질서를 따르기 위해 사용된 말이 아니다. 노장의 무(無)는 없음 자체가 아니라, 유무상생?유물혼성과 같이 대립된 두 면이 새끼줄처럼 하나(一)로 꼬여 계속 변화하기에 규정할 수 없음을 뜻한다. 

텅 비어 있는 듯 에너지로 가득한 허공(虛空)처럼 너무나 커서 인간의 언어로 담아낼 수 없는 존재양식을 무(無)라고 하는 것이다. (선)불교에서 말하는 공(空) 역시 세속의 시비(是非)나 호오(好惡)의 감정을 넘어, 스스로 부처가 되는(成佛) 해탈(解脫)의 경지를 이른다. 불교의 공(空)이나 노장의 무(無)는 유일한 하나가 아니라, 다양한 차이의 종합, 개별자들이 저마다 자기 빛을 발하는, 그런 세계 또는 삶의 길(道)을 의미한다. 자신의 행위를 스스로 결정하며(道行之而成, 장자), 그 밖의 다른 규칙을 따르지 않는(無爲自然, 노자) 이 길(道)은 결코 지배자를 떠받치지 않는다. 그러나 지배 권력은 이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백성들을 훈육하는 데 활용해왔다. 

서양 근대의 철학자 스피노자가 도덕을 에틱(ethics)이라고 바꾸어 말한 데도 이런 뜻이 담겨 있다. 에틱은 집단이 아닌 개별자의 도덕을 의미한다. 이후 니체도 『선악을 넘어서』에서 강조하고 있듯이, 선(good)과 악(evill)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선악의 구분을 넘어서 나(개별자)에게 좋은 것(good)과 싫은 것(bad)을 스스로 판단하는 것, 개인의 욕망을 긍정하는 것이다. 이를 스피노자의 말로 코나투스(Conatus)라고 한다. 코나투스는 살고자하는 욕구 내지는 의지를 말한다. 이를 추동하는 힘은 기쁨이다. 결코 권력을 탐하거나 타인의 생명을 빼앗는 데서 느끼는 기쁨이 아니다. 금력이나 권력으로 누를 수 없는, 유쾌하게 터져 나오는 웃음, 그 즐거움이 코나투스이고, 이 기쁨의 윤리는 개별자의 사랑을 기초로 한다.

집단이 요구하는 체제와 규범, 제도에 갇혀서는 실현할 수 없다. 바깥의 체제와 그것을 내면화한 자기 안을 동시에 흔드는 (자기로부터의)혁명이 동반돼야 한다. 그러나 오랫동안 훈육되고 학습돼 온 사람에겐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상상하면, 나의 조상은 초식동물이었을 것이다. 열매를 찾아 풀을 헤집다가 어느 평평한 터에 수북이 자란 풀을 발견하였을 것이다. 그곳에 터를 잡고 살면서, 그 터를 가야라고 불렀을 것이다. 그러다 땅과 수확물을 신라에 빼앗겼을 것이다. 처음에는 극렬히 저항했겠지만, 점차 신라의 식민이 되었을 것이다. 그 세월이 길어지면서 점차 고려의, 조선의, 일본의 식민으로 살아왔을지도 모른다.

그 후손인 나는 자본의 식민이 되어 있다. 자본의 바퀴에 깔려 참 나(我)도 잃고 너도 잃고 웃음도 잃고 어디론가 가고 있다. 과연…? 다양한 모양과 빛깔의 연꽃을 보면서도, 뭇 생명에 깃들어 생명을 주고는 머무르지 않고 흐르는 저 물길을 보면서도, 저것이 삶의 길이란 걸 알면서도…. 생의 시간이 오후 5시를 훌쩍 넘어선 지금, 나는 펜 끝에 힘을 주며 남은 시간과 가야할 길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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