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양산군 물금면은 본래 상서면(上西面)이라 불렀는데, 행정구역 개편시 면소재지인 물금리의 이름을 따서 면 이름도 물금면이라 하였다. 물금리는 본래 물고미(勿古味)라고도 불렀던 곳으로 옛날부터 낙동강(洛東江)을 건너는 나루터가 있어 물금진(勿禁津)으로 알려졌던 곳이다. 물금이라는 이름은 옛날 신라와 가락국(김해)이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국경을 접할 때 두 나라의 관리들이 상주하면서 왕래하는 사람과 물품을 조사, 검문하던 곳이었다. 

관리들의 검색이 심하여 강을 건너는 두 나라 사람들이 매우 불편한 까닭에 불만이 많았으므로 양국 대표가 모여서 의논하기를 이 지역만은 서로 '금하지 말자'는 합의를 하였다고 한다. 그 뒤부터 이곳은 서로 금하지 않고 자유롭게 왕래하도록 하였으므로 '물금(勿禁)'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물(勿)은 없을 물(부정사), 또는 말 물(금지사)이며, 금(禁)은 금할 금이다.

또 다른 유래는 이 일대가 낙동강 하류 지역으로 수해가 심했던 곳으로 물이 넘치지 말 것을 기원하여 '물금(水禁)'이라고 지은 이름이 현재의 표기로 고착화 되었다는 설도 있다. 물(勿)자가 발음을 적은 이두 표기로서 "물"(水)을 말할 가능성도 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 지명들의 상당수가 소리를 적은 이두 표기의 흔적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곳은 옛날 황산진(黃山津) 이라고도 불렀던 곳으로 신라 탈해 이사금 때인 서기 77년 음력 8월에 아찬 길문(吉門)이 황산진(黃山津) 어구에서 가야군과 싸워 1천 기를 베어 크게 이겼다고 한다. 

신라 법흥왕 11년(524) 9월에 왕이 직접 남쪽 경계(황산 지역)를 순행하여 지경(地境)을 개척하였는데, 금관가야국의 왕이 이때 찾아와 법흥왕을 만났다. 회견 내용은 아마도 투항 조건을 타진한 것으로 짐작된다. 본가야는 532년에 금관국주(金官國主) 김구해(金仇亥)가 세 아들과 함께 신라에 항복해 옴으로써 정식으로 합병되었다. 본가야의 투항은 신라로 하여금 낙동강과 남해안의 교통상의 요지인 김해를 발판으로 가야의 여러 나라를 정복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물금이란 지명이 문헌상에 최초로 등장하게 되는 것은 1747년(영조 23) 권만(權萬) 군수의 '봉산혁파장계'(封山革罷狀啓)로 양산의 서쪽은 황산강구 소위 물금진이요 위로는 10리에 달하는 돌사다리 길이 있다고 하였다. 1786년 '양산군읍지(전)' 면리에 서면(西面) 자연마을 중 '勿古味里 黃山里'이라는 기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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