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년 중 가장 더운 때를 삼복더위라 일컫는다.

초복, 중복, 말복이 지나는 때이다. 중복이 22일이고 대서(大暑)가 바로 그 뒷날 23일 되는 것이다. 한창 무더위가 지나고 있는 것이다. 많은 비를 몰고 오는 5호 태풍 '다나스'가 우리나라 남부해안을 향해 북상중이라고, 기상대 일기예보가 꽤나 요란스럽다.

우리나라는 한서(寒暑)의 차가 너무 심해서 동장군(冬將軍) 혹한(酷寒)이 지나고, 여름에는 삼복더위 혹서(酷暑)가 지난다. 산자수려(山紫水麗)한 우리나라는 4계절이 뚜렷하고 삼한사온(三寒四溫)의 겨울날씨는 한반도 특유의 기후현상인 것이다. 지금은 기후변화 지구온난화에 의해 한반도 특유의 삼한사온의 기후현상도 사라졌다는 설이 있다.

삼복더위 복날에는 개를 잡아 몸보신을 하거나 계삼탕(鷄蔘湯)을 먹고 땀을 빼는 풍속이 있었다. 개를 잡아 식용하는 데는 요즘 말이 많지만, 보신탕을 먹는 것은 영양보충에만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고, 동지팥죽이 의미하는 벽사(?邪)행위의 일종이었다고 세시풍속은 전한다.

복날의 세시풍속으로는,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이나 깊은 숲속의 정자를 찾아 음식과 술을 마시며 하루를 즐겨 놀았다. 임금은 높은 벼슬아치들에게 궁궐내의 얼음 창고를 열고 얼음덩이를 나누어 주었다. 빙과(氷菓)를 나누어 주기도 했다는 것이다. 일반 민가에서는 밀전병이나 수박을 먹는 풍속도 있었는데 이도 복(福)을 집안으로 불러오는 것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이런 옛 조상들의 세시풍속도 까마득한 옛날이야기가 되었다.

지금은 삼복더위 무더위의 계절이 오면, 바캉스니, 휴가니, 레저 캠핑이니 하여, 해수욕장이나 워터파크, 물 좋은 계곡을 찾는다. 연인이나 가족의 손을 잡고 외국여행을 즐기는 일도 일반화되었다. 휴가철 국내외 모든 공항들은 피서여행객으로 붐비고, 그중에서도 영종도 인천공항이나 제주도의 제주공항은 이때 초만원으로 몸살을 앓는다.

요즘 세상이야 에어컨, 냉풍기, 아이스박스에 눈가림 똥꼬치마, 팬티바지, 얼마나 편리하고 시원스러운가. 산으로 바다로 떠나면 되는 것이다. 배타고 울릉도 가고 하늘 길 따라 외국으로 떠나면 되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보릿고개 엄동설한이 삼복더위와 함께 떠오른다. 일년 중 이 세 고개를 넘어야 했던 옛사람들의 곤궁했던 삶의 모습이 새삼스럽게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다. 궁핍했던 선인들의 삶의 모습에서 존경과 안타까움이 솟는다. 숙연한 마음에 저절로 머리가 숙여지는 것이다.

보릿고개엔 누렇게 뜬 얼굴이 퉁퉁 부어 있었다. 굶어서 얼굴이 뜬색이 되고, 쑥죽, 송기죽, 독한 풀뿌리, 나뭇잎죽만 먹어서 온몸이 퉁퉁 부어 있었다. 그래도 그런 사람은 숨이 길어서 살아는 있었다. 병약한 순이 엄마는 벌써 닷새 전에 배곯아 죽었다.

발등에 얼음이 들어 검붉게 흐물어진 윤식이 동생은, 엄동설한 겨우내 홑적삼으로 다 떨어진 버선을 신고, 짚세기 털멍신으로 한겨울 삼동(三冬)을 보냈다. 서속밥도 못 먹어서 뒷곁 대밭에서 돼지감자를 캐다가 화로에 구워 끼니를 때웠다.

농사꾼 서민 머슴들의 삼복더위는 가히 살인적인 노동의 계절이었다.

다 자란 벼논에 들어서면 목에 숨이 턱턱 막혔다. 논김 매기는 삼 세벌을 꼭꼭 삼복더위에 매야 했다. 텁텁한 탁배기 한잔 술기운이 아니면 허리가 펴지지 않았다. 하루 종일 엎드려서 논바닥을 기어 다니면 눈알이 다 튀어나오고 삼년 묵은 김치가닥이 다 솟구쳐 올랐다.

삼복더위, 땡볕 불볕, 1945년 해방 되던 해의 여름 볕은 유난히 불볕이었다. 32도 33도가 오르면 웃통을 벗어젖히고 숨을 헐떡거리며, 사람 죽이는 더위라고 혀를 내두르던 시절이었다.

그래도 왜놈, 쪽발이가 물러갔다고 동네사람들은 꽹과리 북장구를 들고 나섰다. 면소재지 소학교 운동장엔 흰옷 입은 백성들로 차고 넘쳤다. 가죽장화 신고 큰칼 찬 왜놈 순사부장은 얼씬도 못했다.

조선독립만세!

꽤괭 꽹꽹, 쿵작쿵, 농악소리도 드높이 땡볕 불볕 삼복더위도 상관없이 그해 해방조선의 하늘은 맑고 푸르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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