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개국 이래 음악을 듣는 것에서 보는 것으로 바꾼 엠티비(M-TV). 하지만 8년 뒤 단순한 비디오 클립만으로는 콘텐츠가 부족하다고 생각한 엠티비의 한 스태프가 'If We Ever Meet Again'으로 유명한 레클리스 슬리퍼스의 프론트맨 줄스 쉬어에게 "뭐 괜찮은 아이템 좀 없을까?" 조언을 구했고, 마침 어쿠스틱 기타만으로 노래하는 앨범을 제작하고 있던 그의 머리에서 '전기를 쓰지 않는 스튜디오 라이브'라는 아이디어가 나오게 된다. 바로 우리가 아는 언플러그드(Unplugged)의 시작이다.

홀 앤 오츠와 올맨 브라더스 밴드까지 날것의 음악에 심취하게 만든 이 매력적인 기획은 이후 머라이어 캐리와 너바나, 미스터 빅과 익스트림 등에까지 손을 뻗으며 콘센트를 뽑는 콘셉트로서 크게 유행하게 된다. 이 앨범은 그런 언플러그드가 생긴 지 3년 뒤인 1992년 에릭 클랩튼의 공연을 담은 것으로, 아들을 잃은 슬픔을 이기기 위해서였는지 로열 앨버트 홀 공연과 영화 <리쎌웨폰 3> 사운드트랙 작업 등 정력적인 활동을 마친 뒤 예정했던 2개월 전미 투어에 오르기 전 응한 무대다.

포플레이의 네이선 이스트(베이스), 톰 페티와 조니 캐시를 보좌했던 드러머 스티브 페론, 조지 해리슨과 빌리 조엘이 신뢰했던 퍼커셔니스트 레이 쿠퍼, 올맨 브라더스 밴드의 전성기를 함께 했던 척 리벨(키보드), 그리고 케이티 키순과 테사 나일스가 백킹 보컬을 맡은 이 공연은 에릭 클랩튼이 15~6세 때 즐겨 들은 블루스 곡들을 중심으로 연주곡 'Signe', 향후 자신의 음악 방향을 가늠케 한 'Tears In Heaven'과 'Lonely Stranger', 패티 보이드에게 바친 러브송 'Layla', [Journeyman](1989)에 수록하기 위해 로버트 크레이와 함께 쓴 'Old Love'가 더해져 세트리스트가 완성되었다.

57년 보 디들리가 썼고 크리던스 클리어워터 리바이벌(이하 'CCR')도 커버한 바 있는 'Before You Accuse Me'로 앨범은 진정한 막을 올린다. 어릴 때 들을 땐 잘 몰랐는데 블루스라는 장르가 에릭 클랩튼에게 어떤 의미인지, 나이가 조금 들어 다시 듣는 두 번째 곡은 26년 전 들었던 그 두 번째 곡과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이어지는 곡 'Hey Hey'는 머디 워터스와 찰리 패튼, 로버트 존슨을 매료시킨 델타 블루스맨 빅 빌 브룬지의 50년대 명곡으로 에릭은 원곡의 흙냄새를 간직해내기 위해 기타에도 노래에도 욕심을 버리고 여유를 묻혔다.

'Old Love'와 함께 [Journeyman]에 실렸던 제리 린 윌리암스의 'Running on Faith'. 도브로(Dobro) 기타로 한껏 멋을 낸 연주는 먼저 간 친구 듀언 올맨에게 바치는 것("듀언이 살아 있었다면 이렇게 연주했을 것이다" -에릭 클랩튼)이다. 케이티와 테사의 마지막 화음이 둘의 우정을 더 먹먹하게 만든다.

델타 블루스 거장 선 하우스가 작곡하고 클랩튼의 우상 로버트 존슨이 유행시킨 'Walkin' Blues'의 짧은 운치가 지나고 나면 A-A-B 구성의 전형을 따른 트래디셔널 컨트리 블루스 넘버 'Alberta'가 흐른다. 슬라이드 바를 손에 끼운 채로 12현 마틴 기타를 연주하려던 클랩튼의 몸 개그가 장내 분위기를 편안하게 만드는 와중 스티브의 차분한 셔플 비트와 척의 랙타임 피아노가 가세, 사람들 마음을 봄눈 마냥 녹아내리게 했다.

에릭은 비교적 덜 알려진 로버트 존슨의 곡을 하나 더 부르는데 바로 'Malted Milk'다. 조용하고 부드럽게, 다시 한 번 월터 힐의 영화 <크로스 로드>를 보고 싶게 만드는 치명적인 매력이 이 곡에는 있다.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는 로버트 존슨에게 영혼을 빼앗기는 진귀한 경험을 어쩌면 에릭과 우리 모두는 한 것일지 모른다.

나에게 에릭 클랩튼이라는 뮤지션, 나아가 '블루스 키드' 에릭 클랩튼의 진면목을 알게 해준 첫 앨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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