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언어는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인간은 언어 기호를 통해 세계를 받아들이고 또 자신을 표현한다. 글이나 그림, 부호와 같은 기호가 없다면, 과거에 어떤 인류가 살았고,  어떤 사건을 겪었는지 어찌 알 수 있으랴. 유럽이나 아프리카 어딘가에 소수민족이 살고 있다는 사실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언어 기호가 본디 부정적 기능을  더 많이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가령, 장미꽃을 아름다운 장미꽃이라고 말할 때, 아름답지 않은 것, 장미꽃이 아닌 꽃, 꽃이 아닌 것들은 배제·부정된다. 오염되거나 훼손된 장미, 장미가 아닌 호박꽃, 꽃이 아닌 동물이나 광물을 배제·부정하게 되는 것이다. 그림 역시 마찬가지다. 공중화장실 앞에 남녀를 구분하여 그린 기호는 트랜스젠더를 배제하고 부정하여 폭력을 행사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문제는 언어의 이런 부정성을 생각지 않고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가령, 신대륙이란 말의 의미를 떠올려보자. 대개는 숨은 의미를 생각지 않고 미국인들이 사용한 말을 그대로 따라 쓴다. 과연 괜찮을까? 신대륙이란 말 속에는 원주민들을 배제하는 차별적 시선이 담겨 있지 않은가. 우리가 사용하는 불우한 이웃, 장애인, 여검사 등도 다르지 않다. 과연 누가 불우하고 누가 장애인가? 검사면 검사지 여검사는 또 뭔가? 이렇게 말하는 기준은 무엇이고, 누가 그것을 규정하는가? 결국 관점 문제다. 어떤 언어를 사용하는가 하는 것은 대상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하는 것과 연결된다. 자칫 타인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다. 

우리가 흔히 쓰는 봉사라는 말도 그렇다. 이 안에는 내가 남보다 조금 더 낫다는 우월의식이 담겨 있다. 신체적이든 정신적이든 심리적이든 내가 대상보다 낫다는 인식이 전제된다. 봉사라는 말은 그래서 더 고민해야 한다. 최근엔 학생들이 진학이나 취업을 위한 일종의 스펙으로 인식하고 있기에 더욱 그렇다. 봉사는 왜 하는가? 결핍을 메우기 위한 것이 아니고, 남을 위한 것만도 아니다. 텅 비어 보이는 저 허공이 에너지로 가득 차 있듯이, 우리는 이 세상에 가득한 자연의 몸을 빼앗아 생명을 유지한다. 먹고 마시는 밥과 반찬과 국이 어디서 왔는가. 물, 풀, 씨앗, 열매, 동물…. 우리 입에 들어오는 것은 모두 다른 생명의 시체(屍體) 아닌가.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기에 돌려주는 것은 자연의 질서다. 

나의 일자리도 (사회구조적 기준에 의해)내가 먼저 취한 것에 불과하다. 누군가도 충분히 할 수 있고, 또 하고 싶지만, 어떤 이는 자신의 조건과 상황 때문에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향유하는 것들, 내가 선취한 것들은 나누어야 하고 언젠가 돌려주어야 한다. 당연한 일이고, 그냥 하는 것이다. 본디 내 것이 아닌 것을 돌려주는 데 봉사는 무슨 봉사인가. 물론 나누는 데 인색한 사람이 워낙 많다 보니 이 말도 생겨났겠지만, 봉사를 자랑할 일은 아니고, 스펙이라고 내세울 일도 아니며, 증명하듯 사진을 찍어 SNS에 게시할 일은 더욱 아니다. 받는 이의 입장을 생각해보라. 그 마음이 어떨까?

자신을 동정하고 연민하는 사람이 없듯, 타인을 향한 섣부른 동정은 삼가야 한다. 사실 우리도 시시각각 변하는 삶의 과정에서 늘 타인이 되어가고 있지 않은가. 지금의 나는 어제의 나, 혹은 조금 전의 나와 항상 다르다. 나는 나에게서 늘 너/타자가 되어가는 과정 중이고, 조금 전의 나는 지금의 나에게 늘'너'가 된다. 

나를 객관화하여 너로 바라보지 않고는 자신을 제대로 볼 수 없고, 나와 다른 너와도 관계할 수 없다. 삶도 언어도 관계 속에 있고, 맥락에 따라 늘 다르게 이해된다. 우리에게 언어가 필요하다면, 관계를 위해 꼭 필요한 요소라면, 언어 본래의 부정성·한계를 염두에 두고 사용, 실천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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