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주변사람들이나 젊은 학생들에게 이런 질문을 해본다. 우리는 더 행복해졌을까? 어떤 이는 그렇다고 답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이 훨씬 더 많다. 왜 그럴까? 사실 우리는 과거에 비해 엄청난 풍요를 누리고 있다. 먹고 입고 잠자는 일 자체는 지금의 우리에게 큰 문제가 아니다. 과거와 달리, 사회 분위기도 자유로워져서 자기 목소리를 내는 데 대한 제약도 크게 받지 않는다. 그런데도 왜 사람들은 삶이 불행하다고 느낄까? 혹시 우리를 둘러싼'자본'의 문제 때문은 아닐까? 아마 그럴 것이다. 

그러나 자본의 문제로만 치부하기에는 무언가 석연찮다. 물론 자본의 경쟁논리는 불행의 씨앗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경쟁을 해야 하고, 살아남기 위해선 상대를 쓰러뜨려 이겨야 한다. 그래야 자본뿐 아니라 성공의 획득 여부도 결정되기에 상대를 짓누르고 음해하는 일도 다반사다. 이 경쟁을 자본은 강요하지는 않는다. 선택은 각자의 몫이고, 성공도 개인의 능력이라고 미룬다. 다만 이 체제를 따르지 않으면 자본은 가혹하게 보복해온다. 그 힘은 국가와 국가, 기업과 기업뿐 아니라 기업과 개인, 남녀노소, 심지어 부모자식 간에도 발휘되며, '없는 자'를 짓누르는 권력으로 작동한다. 이렇게 보면 불행의 근본 원인은 자본 자체라기보다 자본과 짝패를 이룬 권력의 문제인 셈이다. 

사실 권력의 문제는 역사 이래 지속적으로 이어져 왔다. 알다시피, 근대사 이래, 교회의 권위는 국가의 권위로, 국가의 권위는 양심의 권위로 대치되었다. 오늘날의 후자, 즉 양심의 권위는 상식과 여론이라는 익명의 권위로 대치되었고, 이 권위는 다수를 묶어내는 동일성의 논리로 고립된 개인, 소수자를 강하게 압박한다. 사회적 자아로서의 인간은 고립에서 벗어나야하기에 타인과 관계 맺으려 하고, 어디엔가 소속되려고 한다. 시민은 국가, 학생은 학교, 노동자는 기업에 소속됨으로써 그 집단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거기서 일체감이나 안정감을 느끼려 한다. 

학교 다닐 때는 좋은 성적을 얻으려하고, 어른이 되어서는 더 많은 돈과 특권을 얻고자 하며, 더 넓은 집, 더 멋진 자동차를 사들여 여러 곳을 여행하려고 하는 이유도 이 동일시의 욕망에서 비롯된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우리는 이 동일시의 '환상'을 품고 살아간다. 자본을 표상하는 돈이 한 푼도 없이, 그래도 행복하다고 자유롭다고 말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이 세계에서 주인은 자본이고 인간은 그것을 추종하는 노예와 같다. 그것을 소유함으로써 느끼는 존엄함, 우월감, 정상의 대열에서 이탈하지 않았다는 안도감은 그저 환상에 불과하다.

이 환상, 타인 혹은 집단이 만들어 놓은 허상을 쫓을 때, 우리는 개체의 자발성을 포기하는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한다. 설령 생물학적으로는 살아 있다 하더라도 그 감정과 정신이 죽어 있다면 그 삶은 죽어 있는 것과 다름없다. 우리는 이것을 이미 잘 알고 있으면서도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생각을 하면 혼란스럽고, 또 무력해지기에 집단의 논리에 따라서, 정체불명의 미래를 위해, 불확실한 미래의 행복을 위해 현재를 저당 잡힌 채 살아간다. 그래서 도무지 생기가 없다. 이 세계는 얌전하게 죽은 돈들로 넘쳐나고, 사람들도 얌전하게 죽어가고 있다. 

그러다 충격적인 사건에 부딪쳐야 스스로 질문하게 된다. 내가 이 일자리를 얻고 훌륭한 자동차를 가진다고 해서, 또 이런 여행을 한다고 해서 뭐 그리 대단한가? 이 모든 것을 바라고 있는 내가 진실로 나일까? 그저 다른 이를 위해 살다가 세상을 훌쩍 뜨게 되는 건 아닐까? 여전히, 인문적 사유가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인문학은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 질문을 하게 한다. 이대로 괜찮을까? 이 살벌한 경쟁논리 안에서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끼지도 못하고, 감정을 교류할 사람 하나 만나지 못하고, 나는 과연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하고. 각자가 대답할 그 답이 새로운 삶을 위한 또 다른 길을 열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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