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이섭 문화교육연구소田 소장
[특별기고] 나무로부터의 배움

전이섭 문화교육연구소田 소장

안으로는 나이테를 만들며
밖으로 싱그러움을 발하기 위해
安分知足 생을 이어가는 나무 

 

나무의 서(序) 

올해는 유실수 위주로 여러 종류의 나무들을 심으며 어느 자리에, 어떤 토양 조건에, 어떤 나무들을, 어떤 의미로 심을까를 깊이 고민하게 되었다. 물을 좋아하는지, 물빠짐이 좋아야 하는지, 일조량이 많아야 하는지, 음지를 좋아하는지, 과실이 달릴 때를 생각하여 방향을 어느 쪽으로 향하게 할 것인지, 보기에 좋도록 어떻게 배열해서 심을 것인지 등등 고려할 것들이 많았다. 그렇게 나무를 다 심고, 그동안 없던 이름 팻말까지 다 만들어주고 나니 자꾸만 눈길이 가고, 새 땅에 와서 온기를 받아 싹을 틔우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어린 묘목들이 사랑스럽게까지 느껴지는 요즘이다.

소이연(所以然)

나에게는 나무 스승이 두 분 계신다. 한 분은 나의 할아버지(田鶴律)다. 증조할아버지를 일찍 여읜 외동아들 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에 징용으로 끌려가셨다가 도망쳐 나와 천성산을 작업장으로 숯을 구워가며 빈농의 집을 온몸으로 일으켜 세우신 분이다. 이른 새벽부터 나무 일을 하기 위해 톱 줄질로 시작하던 할아버지는 하루를 마감하는 저녁 장작패기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도구들을 이용해 연장을 만들고 나무를 다루는 모습을 손수 보여주셨다. 그 덕에 자연스레 도구의 사용법과 나무 다룸을 보고 자라왔다. 내가 목공 일을 하게 된 소이연(까닭)이다.

목공은 철학(哲學)이다

목공 일을 해 보면 함부로 나무를 자르지 못한다. 쇠는 녹여 다시 붙이면 되고, 흙은 반죽해서 다시 만들면 되지만 한 번 자른 나무는 다시 붙이기 어렵고, 반드시 자국을 남긴다. 나무를 켤 때면 달콤한 향, 매캐한 향, 구수한 향 등 각각 냄새도 다르다. 톱날이 지나갈 때 상쾌하게, 애잔하게, 섬뜩하게 등 그 느낌도 다르다. 결에 따라 개운하게, 답답하게, 성가시게 등 사포질 할 때의 기분도 다르다.
각각의 나무마다 고유의 성질이 있고, 자라온 토양과 환경에 따라 온전히 그 시간들을 머금고 있기 때문이다. 잘 말려져 쪼그라들고, 비틀어진 나무가 잘리고, 깎여나가 책상이며 의자 등 기물이 되어 있어도 제 각각의 색상과 질감, 향기를 머금은 채 숨을 쉬고 살아있는 것이 나무이다.
이렇듯, 목공 일을 하며 제일 중요한 것은 멋진 디자인, 훌륭한 기술이 아니라 나무의 성질, 즉 물성을 헤아려 적재적소에 나무를 쓰는 것이라 하겠다. 목공은 미술이, 기술이 아니다. 철학이다.

2008년 진등산에 소나무 묘목.
2018년 진등산에 소나무 가지치기 작업.

아낌없이 주는 나무

인간의 관점에서 나무 같은 식물에 빗대어 표현한 최악의 표현은 아마도 '식물인간'이지 않을까 싶다. 사전적 의미로 식물인간(植物人間)은 대뇌의 손상으로 의식과 운동 기능은 없으나 호흡, 소화, 흡수, 순환 등의 작용은 계속되어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의 사람을 일컫는 것인데 과연 나무라는 식물이 의식이 없으며 운동 기능이 없을까?
해 뜨면 잎을 펼치고 해 지면 잎을 오므려가며 인간들(동물)이 생산해낸 온갖 이산화탄소를 머금고 땅 속의 뿌리로 물을 빨아들이며 푸른 잎사귀로 햇빛을 받아들여(광합성작용) 탄수화물을 만들어내고 산소를 만들어주는데도, 어디 그뿐이겠는가 철마다 색색의, 향향의 예쁜 꽃으로 눈과 코를 즐겁게 해주고 사람 몸에 좋은 열매와 약으로 입과 오장육부를 즐겁고 이롭게 해주는데도, 또 온몸으로는 집을 짓고 가구와 도구를 만드는 목재를 주는데도 말이다. '식물인간'이란 말은 아주 이기적이고 동물적인 인간의 표현이다 생각을 한다.
인간이 나무의 한 부분만 보고 무심하게 내버려두는 것 중에는 매실나무가 있다. 혹독한 추위를 이겨낸 인고의 시간은 뒤로 한 채 꽃을 피울 때는 매화나무라 하였다가 열매를 맺을 때는 매실나무라 이름을 바꿔가며 그 달콤함만을 취하는 경우가 그렇다. 열매까지 내어주고 난 나무의 껍질은 어떠한지, 잎사귀는 어떤 생김새일까 사람들은 기억이나 하고, 눈길이나 줄까?
사람을 평가할 때 예쁜지, 멋있는지, 부자인지, 사회적 지위가 어떤지만 평가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냉대하는 것이나 다름 아니겠다. 생명체 그 자체로 바라봐야 할 것이다.

十年之計 莫如樹木(십년지계 막여수목)

미세먼지에 지구온난화에 나무의 경제적, 환경적 중요성이 대두되고 있는 지금, 서울시는 '2022-3000, 아낌없이 주는 나무심기 프로젝트'를 추진한다고 한다. 올해 500만 그루를 시작으로 2022년까지 총 3000만 그루의 나무를 심어 도시숲을 확충한다는 목표인데 4년간 총 4800억 원을 투입하여 미세먼지 저감, 도심온도 저감, 산소 공급이라는 효과를 기대하고 있다.
우리 시에서도 '양산시민 건강 숲 조성'사업을 펼치고 있다. 좋은 일이지만 식재목이 외래종 루브라 참나무이다. 생장률이 빠르고, 경제적 효과가 큰 좋은 나무라 한다. 전문가들의 의견을 충분히 반영한 것이라 생각은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양산의 시목과 가로수 상황도 생각해 볼 일이다.
시목 하나를 지정함에 있어 생물학적 의의만 나열한 채, 의미부여가 복잡하다. 비단 양산 뿐 아니라 전국 각 지자체의 나무들도 지정 사유가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 이팝나무는 내가 살고 있는 상북면 주변 및 양산IC 인근에 경관용으로 식재되어 있어 자주 볼 수 있기는 하지만 기왕에 시목으로 지정한 것이라면 더 특색 있게 이팝나무를 가꾸어 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양산의 가로수 상황을 보면 메타세쿼이아, 느티나무, 은행나무, 소나무, 배롱나무, 마가목, 칠엽수, 낙엽송 등이 많이 보인다. 10여 년 전, 민선 4기 때 메타세쿼이아를 가로수로 국도7호선과 35호선 등 주요 시내도로에 식재하기 시작했다. '숲의 도시 양산만들기' 사업의 일환으로 진행했을 것인데 당시에는 과도한 밀식으로 인해 채 몇 해가 지나기도 전에 이식하는 비용이 추가로 발생하고, 거대한 나무가 비바람에 쓰러져 차도를 덮치고, 뿌리가 인도로 뻗어 나오는 등 피해가 잇따랐었다. 나무의 성질을 모른 채 당장의 보여주기식 행정의 모습 그 자체로 기억된다.
나무 한 그루를 식재하는 데 다분히 인간만을 위한, 오늘만을 위한 정책을 펼쳐서는 안 될 일이다. 나무를 심는 것은 십년의 계획이다. 나무를 심는 것은 삼라만상(森羅萬象)을 헤아리는 일이다.

안분지족(安分知足)의 배움

천성산 아래 할아버지의 땀으로 일궈놓은 진등산에는 개간하여 논밭을 일구던 자리가 있다. 묵혀둔 이 땅에 아버지가 11년 전 소나무 1천 그루 어린 묘목을 심어놨는데 이제는 엄청 크게 자랐다. 해마다 가지치기, 솎아내기 해 가며 돌보고 있는데 관리하기가 점점 버거워져 간다. 산 아래로는 지난해에 부모님과 함께 편백 200그루를 심었다. 어린 묘목이 잘 자라도록 주변을 정리할 일도 만만치가 않다. 그래도 점점 심해져가는 미세먼지의 저감과 산소 공급에 일조를 할 수 있어서 기쁘다. 할아버지께서 물려주신 위대한 유산에 감사해하며 그 땀방울을 가치 있게 지켜나가고 있어 다행스럽다.
수필가 이양하는 나무를 노래하며 "나는 죽어서 나무가 되고 싶다. 이미 나무를 뜻하였으니 진달래가 될까, 소나무가 될까는 가리지 않으련다."하였다. 나무를 통해 삶을 성찰하는 소박함이 묻어난다. 새로움은 낯설음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주변의 흔한 나무 한 그루에서도 어떤 마음으로 관심 기울여 보는가, 가꾸는가에 따라 새롭게 다가올 것이다.
오늘도 봄 햇살 맞으며 뿌리 굳게 내리고 안으로는 나이테를 만들면서 밖으로는 싱그러움을 발하기 위해 안분지족(安分知足)의 생을 이어가는 나무들과 함께 싱그러운 초록을 담는 텃밭상자를 열심히 만들어 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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