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이 통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들 한다. 다수가 그렇다고 인정하는 이야기라야 통할 수 있다는 것인데, 일견 그럴듯하게 여겨진다. 그러나 상식은 어찌 보면 위험한 말이다. 

상식이란 말이 보편적, 일반적이란 말과 통한다면, 보편적 상식으로는 소통하기 어렵다. 소통의 궁극 지점이 사랑이라면 더욱 그렇다. 

보편적·일반적 논리를 앞세울 때, 대상은 반드시 너 아니어도 되고, 다른 사람으로 대체·교환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사랑은 너 아니면 안 된다. 내게'너'가 사라지면 너에 의해 존재하는 나도 사라진다. 한 우주가 사라지는 듯 여겨진다. 

사랑은 나에게 가장 특별한 것, 대체 ·교환이 불가능한 것, 일반명사가 아니라 고유명사로 다가오는 것이다. 네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원하는지, 너를 더 알고 싶어 하고 원하는 것을 해주려고 노력하는 것…. 이 사랑이 진정한 소통을 가능케 한다. 여기서 너를 반드시 사람에게만 한정할 필요는 없다. 

일이나 학업, 국가도 사랑 대상이 된다. 그 대상이 학업이라면 그 분야를 탐색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고, 한 사회나 국가라면 시민들이 원하는 것을 알고 싶어 하고, 그것을 해주려고 노력해야 한다. 사랑은 강제로 할 수 없고, 오로지 심장의 울림에 따른다. 

그러나 국가나 사회에 대한 사랑에서 그런 사랑은 발견하기 어렵다. 대개는 나를 더 내세우고, 자신의 이익을 강조하며, 대상이 원하는 것은 생각지 않는다. 어찌 보면 다들 관람자고, 구경꾼들이다. 

가령, 세월호사건과 같은 큰 사건이 일어나면,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일인 듯 가슴 아파한다. 그러나 다수는'척'할 뿐, 실제로 절절한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 자식 잃은 부모만큼 절실하지도 않고, 일이 바쁘면 돌아서 잊어버린다.

어쩌면 이것은 우리의 한계일 수도 있다. 신이 아닌 이상 개인이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며, 그들의 아픔을 어찌 다 감당할 수 있으랴. 문제는 자기 옆에 있는 사람조차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 

우리는 부모님을 사랑한다지만 정작 부모님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려고 하지는 않는다. 부모님이 어떤 빛깔을 좋아하는지, 어떤 음식을 어떻게 요리해야 좋아하는지, 병석에 누워계신다면 어떤 노래를 들려주어야 좋아할지 알려고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 

그리고선 돌아가신 후 최고급 납골당을 마련해주고 자기 할 일을 다 했다고, 효도했다고 자위하는 사람도 있다.

나라고 예외일 순 없다. 나는 과연 부모님을 사랑했을까? 자식은? 남편은? 친구는? '그/녀'들이 진정 무엇을 좋아하고 바라는지 알려고 하지도 않고 사랑이라니…. 사랑은 결코 편안한 것이 아니다. 

사랑은 대상을 온전하게 지켜내야 가능하기에, 사랑을 방해하는 대상에게는 극렬히 저항해야 한다. 극심한 고통이 따른다. 이 고통을 겪어내어야 사랑 대상도 지켜낼 수 있다.

사랑, 아니 소통을 위해서는 보편적 상식, 일반 논리에 기대어선 안 된다. 다른 사람은 다 괜찮다는데, 너는 왜 그러냐는 식의 폭력을 행사할 수 있다. 

우리는 각자 이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나/너이고, 보편적 이름으로 대체할 수 없다. 동일한 이름은 많지만, 나를 대신할 사람은 천 년 전에도 천년 후에도 없다. 이것이 존재의 특수성이다. 

남이 원하는 것, 이 사회가 요구하는 상식이 아니라, 나니까 경험할 수 있는 것, 나로 태어나 나로 죽어갈 나만이 할 수 있는 경험을 진지(軫摯)하게, 많이 해봐야 한다.

솔개 발(軫)처럼, 아프지만 그 고통을 꽉 부여잡는 것(摯), 그것이 소통의 지름길이다. 모든 생명이 저마다 특별하듯, 특수한 경험, 그런 고통을 감각해본 사람만이 특별한 너를 껴안을 수 있을 것이다. 

분분히 날리는 저 꽃이 지난해 피었던 그 꽃이 아니듯, 제가끔 특별한 우리들 생에'다시'라는 부사어는 그 누구에게도 쓸 수 없다.

저작권자 © 양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