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에 군수 지내, 말년에 친일 반성하며 사죄
허정 과도정부, 문교부 차관 임명했으나 2공화국 출범

양산고등학교 교사 정문 앞에 있는 '이항녕 교장선생 사은비'.

양산고등학교 교사 정문 앞에 한 비석. '이항녕 교장선생 사은비'라 새긴 이 비석은 1984년에 세웠다. 비석 뒤에는 그의 행적을 기록했다. "4.19 격동기에 문교부 차관으로 재직하며 교육계를 잠재우시고"라는 표현도 있다.  

고 이항녕씨는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고 허정 과도정부때 문교부 차관을 역임한 법철학자다. 이후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 국무총리의 제2공화국이 조각되면서 그는 3개월의 짧은 차관직에서 물러난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고시에 합격해 20대에 하동과 창녕군수를 역임했다. 군수 재임 당시에 일제의 공출에 협력해라며 군민들을 죽창으로 위협했다고 하동군민 공개강연에서 고백하고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 

해방 이후에는 부산의 한 초등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다 양산고등학교 초대교장으로 부임한다. 이후 고려대 법대 학장, 홍익대 총장 등을 역임했다. 

1984년 전두환 군사 정권 당시에 이 학교 총동창회에서 그의 사은비를 세웠고 그 비석이 양산의 중심학교인 양산고교 교정 중앙에 세워졌다.

비석에는 그의 친일행적을 참회했다는 기록은 없다. "후진양성에 몸바쳤다"며 제자들이 "개교 45주년을 맞아 스승의 은공을 흠모"하는 내용이다. 

학생들은 이항녕 초대 양산고 교장의 사은비를 통해 역사를 배운다. 한 학생은 "수행평가에 이 비석을 제출했다. 그러나 이런 전력이 있는 분인지 몰랐다"고 했다. 

강보수 양산고 교장은 "이 비석의 주인공인 이항녕 교장의 일대기를 더 조사해 보겠다"고 했다. 

이형우 6회 졸업생이자 1984년 총동창회 부회장은 "책과 노트도 없던 시절 우리는 선생님께 90분 프리토킹으로 강의를 들었다. 당시 친일을 안하면 굶어죽을 수 밖에 없었다. 사은비에 찬양하는 내용이 들어가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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