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상] 명리학자 역사소설가

인간이 보행을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몸을 운신하지 못한 정도로 병든 사람이 아니라면 한 걸음도 걷지 못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거니는 장소는 방안이기도 하고 거실이기도 하고 아니면 좁은 마당을 거닐기도 한다. 사람이 걷는 데에는 발의 작용이 중요하다. 발의 작용이란 무조건 앞으로 전진하고자 하는 강한 항진 세력을 축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힘에 제동이 걸리면 발이 할 수 있는 모든 역할은 상실한 것과 같다. 이럴 때에는 뒷걸음질을 치게 된다. 뒷걸음질은 5 - 6보 정도는 무의식으로 걷을 수 있지만 40 - 50보 이상은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앞으로 가는 보행과 뒤로 향한 보행의 두 가지 조건들은 모두가 발을 옮기는 동작이지만 전진 보행은 중추신경의 협조가 없어도 진행할 수 있지만 후진하는 보행은 무엇인가 어설픈 걸음마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인간의 전진성 보행은 선천적으로 나타나는 본능이라고 생각된다. 인간은 본능적 보행 때문에 날마다 날이 밝자마자 부지런하게 길을 나선다. 직장으로 향하는 사람, 농사일을 하는 농민, 학교에 가는 학생들,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종별의 아침 나들이가 모두 발의 움직임에 따라 행해진다. 이렇듯 생각과 뜻에 알맞는 행동을 하려고 나선 것은 인간만이 누리는 특권이다. 우리는 누구나 길을 걷는다 하루도 길을 걷지 않고는 생활이 이뤄지지 않는다. 걸어가서 만나고 만나서 일을 맡고 모두가 걸어다니면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사회생활을 영위하여 나가는데 필수적인 사항은 발걸음에서 비롯된다. 만약 걸어다니지 못하면 사람은 사회적인 활동을 영위할 수 없는 것이다. 그 보행에는 넓게는 의지의 흐름, 마음의 연결이 있어 우리 생활을 알뜰하게 챙겨주곤 한다. 그리고 직접 걷는다는 원시적인 방법이 내 자신이 살아 있음을 확인해 준다. 그래서 더욱 보행의 가치를 높여준다.
우리는 다리로 두 가지의 길을 걷는다. 한편으로 길을 걷는다. 걸어서 다다르는 곳을 육체적인 발걸음만으로 여겨서는 안될 일이다. 그러면 우리는 또 무슨 길을 걸어가야 하는가? 그것은 마음의 길이다. 마음의 길이란 무엇인가? 100에서 1을 빼면 99가 된다. 99에서 또 1을 빼면 98이 된다. 이렇게 계속하여 빼나가면 2에서 1을 빼게 되고 또 다시 1에서 1을 빼면 0이 될 것이다. 0에서 0을 빼면 무엇이 나올까? 0이 나올 것이다. ‘0에서 0을 빼고 0을 빼고... N은 0’이라는 수법을 불교에서는 공반야라고 한다. 공반야는 슬기로운 광명이다. 슬기는 어떤 형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광명은 역부여시(亦復如是)다. 흔히 불가에서는 마음을 비우라고 한다. 비운다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을 의미한다. 빈 마음에서 빈 마음을 다시 비우려는 지극한 믿음이 구도의 길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혹여 밖에 나가 돌아다니면서 수 많은 번뇌와 욕망을 마음에 담아 왔다면 속히 털어버리자. 번뇌와 욕망을 수명을 단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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