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유일 수작업 '큐대' 장인 허경훈 씨를 만나다

영화나 드라마에 흔히 어둠을 상징하던 당구가 레크리에이션스포츠로 자리 잡으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당구대 위에서 공을 큐(cue stick)로 쳐서 점수를 겨루게 되는 이 스포츠는 실력만큼이나 큐대의 역할이 크다.

요즘은 기술 발달로 자동화된 기계에서 획일화된 큐대가 많이 생산되지만 30여 년동안 수작업으로 큐대를 만들어온 장인이 있다. 여러 우여곡절 속에서도 꿋꿋이 한 자리를 지켜온 허경훈 씨(‘당구 큐 은성’ 대표)는 이 시대에 마지막 남은 국내 유일 장인이다.

더불어 그에게 30여 년간 작업해왔던 양산은 특별하다. 허 씨는 양산 발전을 위해 각종 협회나 모임에 몸담고, 매년 사회복지재단에 기부하는 등 양산 발전에도 힘을 쏟고 있다.

 

30여 년간 수작업으로 제작해온 장인

110번 공정과정을 거쳐 탄생되는 작품

외국서도 인정받은 실력… 밀려오는 주문

어려운 경기 속에서도 꿋꿋히 지켜온 ‘큐’

사회복지재단 기부 등 양산 발전에 힘써

 

▲ ‘당구 큐 은성’만이 가진 비법

젊은 시절부터 나무를 좋아하고 목공예 기술이 뛰어났던 허경훈 씨는 큐대에 대한 자부심이 남달랐다. 큐대를 만드는 기술은 10년 정도는 갈고 닦아야 제대로 된 작품이 나올 정도로 대단한 기술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국내에는 많은 기업이 CNC기계(컴퓨터를 내장한 NC공작기계)를 통해 획일화된 큐대를 생산하기도 하지만, 100% 수작업을 통해 제작하는 곳은 ‘당구 큐 은성’이 유일하다.

‘당구 큐 은성’에서 생산된 개인 큐대는 10~15년 된 캐나다 단풍나무가 사용된다. 이 단풍나무는 워낙에 나무가 단단하고 야물어서 일반 못을 박으면 휘는 수준이다. 특히 이렇게 수입된 나무들은 우리나라에서 사계절을 겪은 후에 작업하는데, 이는 휨 현상을 막기 위해서다. 우리나라 나무를 사용 못하는 이유는 사계절때문에 옹이와 마디가 많아 휘고 뒤틀림이 심하기 때문에 수입된 단풍나무를 사용할 수 밖에 없다.

그의 손에서 총 110번의 공정과정을 거쳐 큐대는 치밀하고 섬세하게 만들어진다. 다른 곳과는 달리 수작업으로 1mm 혹은 1.5mm씩만 깎아, 약 25회씩 건조와 가공을 상·하대 반복한다. 이는 나무 안에 있는 수분을 말리기 위함이다.

특히 허 씨가 직접 개발해 사용 중인 ‘하기방식’과 ‘코어방식’ 때문에 큐대는 더욱 튼튼함을 자랑한다. 디자인하는 방식으로 대게는 표면에 문양을 프린트하는 프린트방식이나, 표면을 얇게 파내고 물질을 표면에 넣은 후에 가공하는 인레이방식을 이용한다. 하지만 ‘은성 큐’는 하대 중심부까지 파낸 후에 염색된 판재를 접착해 넣고 표면을 가공해 문양을 나타내는 방식을 이용하는데, 이것이 ‘하기방식’이다.

코어방식은 큐대 중간에 구멍을 뚫어 성질이 다른 성질의 나무를 넣어 접착하는 방식이다. 이는 휨 현상을 방지하기 위함이며 타격 시에도 파워가 더 높아진다. 큐대에 코어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은 강도는 차이가 크다.

허 씨는 “개인 큐대는 취향이나 몸무게, 신장, 스냅 힘, 성능 등을 고려해 제작된다”며 “자신만의 최적의 큐대를 가지고 있으면 아무래도 실력을 키우는데 큰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이어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본브랜드를 많이 이용하는데 사실상 대개 일본제품을 쓰는 사람들은 거의 우리나라 사람뿐이다”라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 외제와 견주어도 손색없는 상품

그의 타고난 기술력과 끈기는 여러 방송사에서 소개되면서 또 다시 한번 실력을 인정받았다. ‘sbs 생활의 달인’, ‘kbs 생생투데이’, ‘mbc 이시대의 마지막 장인’ 등 지상파 3사 출연 후 허 씨의 큐대는 전세계까지 수출하기에 이르렀다.

초창기에는 배트남에 있는 친구의 판매로 붐이 일었으나, 나중에는 전세계로 방영된 방송을 보고 베트남, 미국, 일본 등에서 연락이 밀려왔다. 그의 실력은 가히 세계적이었기 때문에 외제와 견주어도 손색없었다.

결국 30여 년 큐를 만드는 일에 열정을 바친 그에게 하나 둘씩 보상이 주어졌다. '한국목공예품 대상', '부산일보 당구큐 장인', '주간일보 한국 기능인', 'CJ 명물인생 명인' 등의 상을 수상하면서 점차 그를 인정해주는 여론이 커지기 시작했다.

심지어 충청도에서는 허 씨를 장인으로 유치하기까지 했으나 그는 양산을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양산의 큰 자랑거리가 됐다.

허 씨는 “당구나 큐대는 가족을 제외한 내 삶의 전부”라며 “우리나라 당구발전을 위해서 스포츠계에 한 획을 그은 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란다”고 바람을 전했다.

 

▲ 끈기와 열정으로 지속된 사업

하지만 그런 허 씨에게도 사업 운영에 어려움은 있었다. 지난 2002년 바다이야기 등 PC 게임이 성황하자 이 사업에도 불황을 겪었다. 10명 남짓하던 종업원들은 각자 제 갈길을 찾아 떠나고 사업은 점점 힘들어져갔다. 그래서 그는 낮에는 목공예를, 저녁엔 주유소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생활고를 이겨냈다.

그렇게 힘들게 사업을 이어나가던 중 허 씨는 ‘이렇게만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으로 봉고차에 무작정 큐대를 싣고 서울로 갔다. 전국 5만5천개의 당구장을 직접 찾아다니며 영업을 시작했으나 돌아오는건 당구장 업주들의 차가운 반응이었다. 거기다 당시 건물에 엘리베이터도 없어 보통 꼭대기에 차지하고 있던 당구장까지 큐대를 가지고 걸어 올라가야 했다.

허 씨는 “아무리 힘들어도 업종을 바꾸거나 포기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나무 냄새를 맡으면서 작업할 수 있는 이 일이 너무 좋았다. 이 직업은 나에게 천직이라 여겼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그는 또 “영업을 하고 잘 곳이 없어 길거리 벤치에서 잠을 자고, 컵라면으로 허기를 달래면서 그렇게 버텨냈다”고 하면서 당시 힘들었던 상황들을 회고했다.

'당구 큐 은성' 허경훈 대표와 그의 아내

이렇게 큐대에 열정을 쏟아부은 데에는 허 씨 아내의 내조도 굉장했다. 아이들의 급식비가 없을 정도로 생활고에 시달리자 아내는 곧장 일선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그의 동반자로서 묵묵히 따라주면서 버팀목의 되어줬다. 그녀는 “사업하는 남자에겐 내 딸을 절대 줄 수 없다”면서 한 때 힘들었던 과거를 떠올렸다.

 

▲ 연예인협회 양산지회 운영위원장 역임 ‘양산 빛내기’

그런 그가 양산 발전을 위해 각종 활동에 몸담고 ‘양산 빛내기’에 나서고 있다.

각기 다른 직업군으로 모인 양산친우회 부회장인 그는 매년 사회복지재단에 300만원씩 기부하고 있다. 그는 또한 양산친우회 정호진 지회장의 권고로 한국연예인협회 양산지부를 다시 새롭게 이어나가고자 운영위원장을 맡았다.

한국연예인협회 양산지부는 무명가수들의 가입은 많았으나 적은 회비로 운영이 힘든 상황이었다. 이에 허 씨가 출석하지 않는 회원들은 과감히 제명처리를 하고 내실 다지기에 주력했다.

허 씨는 “먼저 양산 각 학교마다 연예인 소질이 있는 아이들을 발굴해 서포트를 할 것”이라며 “그렇게 발굴된 아이들에게 아낌없는 지원과 관심으로 스타성을 더 키워 개성을 살리는 것이 우선 첫 번째 목표다”고 말했다.

그는 이렇듯 본업 외에도 여러 활동을 통해 양산 발전에 이바지 하고 있다. 

저작권자 © 양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