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문, 암글로 불리던 글을 한글이 되기까지
한글의 아버지, 한힌샘 주시경 자식들 이름도
순 우리말인 솔메, 세메, 힌메, 봄베, 임메
남북으로 갈린 운명적 두 제자 최현배와 김두봉

사진: 주시경(1876-1914)

 세종대왕과 훈민정음에 관심을 쏟느라 별로 주목하지 못하고 있는 인물이 바로 현대 한국어와 한글의 아버지라 불리는 주시경이다. 황해도 봉산에서 출생한 한글학자 주시경이 살았던 시대는 격동의 시기로 동학 농민운동과 갑오개혁 청일 전쟁으로 시대가 급변해 가던 때였다. 개항 이후의 조선은 외세의 침략으로 큰 혼란에 빠져있었다. 결국 1910년 일제에 국권이 피탈당하는 치욕을 불러 오고 말았다.
 우리말과 글의 문법 체계를 처음으로 세운 주시경은 어린 시절부터 한문을 배우다가 19세(1894년)에 배재학당에 들어가 서양 학문을 접하게 된 것인데, 1897년부터   영국선교사의 한국어 교사 등으로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가며 세계 지리와 역사를 공부한 그는 1895년 정부에서 학비를 대주는 관비생으로 뽑혀 인천부에 있는 이운 학교에서 항해술까지 배웠다. 
 그러면서 서재필을 만나 총애를 받으며 그가 주도한 협성회에서 발행한 [협성회 회보]의 편집을 맡았던 것이다. 그 후 국내에서 거의 유일한 국어국문학자로 활동하던 주시경은 그의 인생에 큰 변환점이 되어 준 인물을 만나게 된다. 바로 갑신정변의 주역의 한사람인 서재필을 만난 것이다. 서재필은 미국 생활을 하다 대한제국을 돌아온 뒤 이상재 등과 자주독립 운동을 이끌었는데, 독립문을 세우고 독립협회를 구성한 등의 일이었다. 주시경은 대한제국을 근대화 자주 독립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서재필의 사상에 감명을 받았다. 주시경은 서재필과 함께 독립협회 활동을 이끌었고 [독립신문]을 우리 글자로 정립하는 일을 담당했다. 
 서재필이 다시 미국으로 망명한 뒤에도 대중 계몽운동을 계속했다. 잡지들에 논설을 실어 외세의 저항하자는 뜻을 폈고 이화학당, 숙명여자고등학교, 오성학교, 기호학교, 배재학당 등 수많은 학교를 오가며 학생들에게 우리의 언어, 글자, 역사, 문화에 대해 가르쳤다. 사라져가는 우리 민족의 주권을 되찾기 위해선 우리 고유의 문화와 언어를 지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경술국치 이후에도 활동은 계속됐다. 
 러일전쟁 이후부터 시작하여 일제의 강점기까지 조선언문회(朝鮮言文會배달말글몯음), 조선어강습소(한글배곧) 등으로 지속되던 강습소를 1911년에 강습소를 조선어강습원으로 격상시켰다. 조선 정부는 한글을 보급입장을 취했지만, 철자법과 외래어 표기법 등 우리말을 한글로 표기할 수 있는 규칙을 제정하지 못해 사람마다 표기법이 제각각이었다. 
 이 상황에서 주시경은 [독립신문] 1897년 9월 25일자에 문법 통일과 사전편찬을 제안했다. 이를 계기로 국문연구소가 생기고 한글 연구와 교육활동 기초가 됐다. 한자어 중에서 `문(門)`, `산(山)`, `음식(飮食), `강(江)`과 같은 우리말로 정착된 것들은 우리말로 인정하고, 그렇지 않은 한자와 외래어를 구별하였다. 
 주시경 선생은 이렇게 바쁘게 계몽 운동을 진행하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한국어에 대해 연구하고 있었다. 헤이그 특사 중 하나인 이준의 권유로 지석영의 국문연구회에 들어가 국가적인 연구 기관인 세종대언문청을 설립했다. 그는 이러한 단체들에서 동료들과 연구한 끝에 우리말과 우리글의 맞춤법, 음운을 바로잡을 수 있게 한 것이다. 
 저서로는 국문 연구서인 [국어문전음학],[말의 소리]가 있다. 국어 교재인 [대한국어문법], [국문초학]을 발간했다. 이런 저서들을 통해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한글의 맞춤법과 음운을 정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한글이라는 명칭도 이때부터다. 기존의 훈민정음, 언문 등으로 불리던 칭호를 주시경이 고친 것이다. 한글의 한에는 크고 무한히 넓은 뜻을 가진 글자와 같은 의미다.
 1911년 그는 프랑스의 식민지인 베트남의 역사를 적은 안남 망국사를 번역하여 출간하였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사서 읽자 일본 경찰은 이 책이 민족의식을 고취시킨다는 이유로 판매를 중지시키고 책을 압수했다. 다음 해인 1912년 일본이 독립 운동가들을 탄압하기 위해 조작한 105인 사건으로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게 되자 해외로 망명할 것을 결심했다 1914년 고향에서 망명을 준비하던 주시경은 급성체증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주시경이 1914년 39세 젊은 나이로 사망하면서 김두봉 이규영 권덕규 등이 강사로 수업을 계속했지만 결국 1917년에 중단됐다. 이 강습소를 수료한 학생은 500여명에 달했고, 이병기, 권덕규, 최현배, 정열모 등의 활동은 계속됐다. 주시경의 애제자였던 최현배와 김두봉은 남북의 초기 언어정책 수립에 결정적인 역할로 하여 우리는 현재 남과 북의 한글 표기는 거의 동일한 수준이 되어있다. 
 한글전용은 물론 문법형태로 된 표기와 가로쓰기 등은 주시경이 우리 민족에게 크나큰 유산을 남긴 것이다. 한글의 아버지로 불리게 된 주시경만이 아닌 그의 두 제자 김두봉과 최현배의 노력이 그 뒤를 받쳤고 수많은 학자들의 노력이 그 뒤를 따랐던 것이다.
 한국말의 특징을 토씨(조사)와 씨끝(어미)의 자유로운 활용에서 찾았던 주시경의 주요 이론이 제대로 계승되지 않았다는 설도 있다. 주시경이 조사와 어미 등을 포함해 모든 낱말에 독립적인 기능을 부여한 것과 다르게 토씨를 임자씨의 부속물로 된 것은 최현배가 일본을 통해 들어온 서양의 말본 체계를 따랐기 때문이라고 한다. 용언의 구성 요소인 씨끝을 분리하지 않는 절충주의 문법체계를 세웠기 때문이란 것이다. 이 같은 이론을 분석주의라고 하는데, 토씨를 임자씨(체언)의 부속물로 여기는 것이 현재의 통설인 것이다.
 최현배는 주시경의 수제자이면서도 일본을 통해 들어온 서양의 말본 체계를 따라 풀이씨(용언)의 구성 요소인 씨끝을 분리하지 않는 절충주의 문법 체계를 세웠기 때문에 그것이 오늘날까지의 형태로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영어는 통사론 중심인데 반해 우리말은 형태론 중심의 언어로 조사를 체언의 부속물로 정의한 현재의 통설은 우리말의 본질을 왜곡한 것이라 지적하는 학자도 있다, 
 조사를 체언의 부속물로 정의하는 현재의 통설은 우리말의 본질을 왜곡한 것이고 주시경이 내놓은 것을 김두봉과 김윤경이 계승한 것으로 끝난 분석주의 말본을 되살릴 필요가 있다고 보는 설도 있다. 
 그러나 북으로 간 기장읍 동부리 출신 김두봉을 조선어학자보다 `무장독립운동가`나 김일성에 의해 숙청된 정치가로 알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주시경 밑에서 한국어를 연구하면서 주시경의 국어사전[우리말본]을 만드는 일을 도왔다. 투옥을 피해 망명을 준비하던 스승 주시경이 세상을 떠나자 그 뜻을 망명 후 독립운동에 전념하면서도 계승하여 한글 국어사전인 [조선말본]을 완성했고, 그리고 중국에서도, 상해에서도 계속된 연구로 [깁더 조선말본]을 간행했다. 
 1922년 그가 펴낸 [깁더 조선말본]은 한글연구의 결실이었다. 그야말로 깁고 더한 것으로 요즘말로는 증보판인 셈이다. 그러나 만주사변과 중일전쟁 등으로 일제를 학자가 아닌 전투로 맞서야하는 태황산 호랑이가 된 것이다. 그가 이끌던 조선의용대가 일본군 대군을 상대로 악전고투 끝에 포위망을 뚫었던 호가장 전투에 몸을 던졌다. 이 전투에서 그의 벗이자 의열단의 최초 조직자였던 밀양 출신 윤세주가 죽었다. 그리고 [최후의 분대장]을 썼던 작가 김학철은 여기서 다리를 잃었다. 김두봉은 일선의 참화를 온몸으로 겪은 독립운동 지도자였다. 그리고 해방 후 귀국하여 북한정권 이전인 48년 `조선어신철자법`을 내놓았다. 
 김두봉의 집안과 주변 사람들은 일제에 식민지에 대항한 사람들이 많다. 조카 박차정과 그의 남편인 김원봉 외 한 가문에서 동생 김두백, 김약수, 조카 김도엽, 김종엽, 김응엽, 김규엽, 김시엽, 8명이 일제에 항거하여 모두 감옥살이를 하고 목숨을 잃었다. 당시 남과 북에서 존경과 기대를 받았으나 지금은 남과 북 양쪽 모두에게 기피 인물이 되어있다. 이것은 한 개인의 비극이 아닌 민족의 비극이다. 
 그가 북한 정권에 흡수됐다고 해서 그가 남긴 항일무장투쟁과 우리말에 대한 노력은 지울 수는 없다. 무엇보다 주시경 문하의 최현배와 함께 남북한 언어 분단을 막아낸 학자다. 머지않은 장래 이런 분들이 반드시 정당한 역사의 평가를 받게 될 그런 날이 오리라 희망해 본다.
 그리고 우리 한글을 수입한 인도네시아 찌아찌아족에 이어 두 번째로 남태평양의 섬나라 솔로몬제도의 `과달카날`주와 `말라이타`주가 한글을 모어(母語) 표기문자로 도입하여 한글의 과학성과 우수성이 다시세계에서 주목받고 있다. 이들의 한글 표기 채택은 한민족 외의 다른 민족이 우리 한글을 문자로 도입한 것은 앞으로 한글의 세계화 가능성을 보여준다 할 것이다. 그 들이 남긴 유산은 세계유산에 등재되고 심지어 국어인 한글을 수출하는 나라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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