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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광/장] 신라와 백제의 구원이 얽힌 대야성 전투
  • 심상도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 승인 2018.11.20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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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동남문화관광연구소장,관광경영학 박사)

 양산을 대표하는 인물은 다양하지만 그 중에서도 금관가야의 왕자로 신라에 귀순한 김무력 장군, 그의 아들 김서현 장군, 손자인 김유신 장군이 유명하다. 이들은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김무력 장군은 한성백제의 옛땅을 신라가 차지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진흥왕 14년 가을 7월에  신라는 백제의 동북변경 즉, 한성백제의 옛땅을 획득하고 그곳을 신주로 삼았는데, 신주의 군주로 임명된 분이 바로 김무력 장군이다. 
 김무력 장군은 554년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 26대 성왕을 사로잡아 참수함으로써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았다. 백제에 궤멸적 타격을 가한 덕분에 신라는 승승장구하며 영토를 계속 확장하였다. 백제의 입장에서는 언젠가 구원을 갚아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런 원한은 642년 대야성 전투에서 도독인 김품석 일가족을 죽이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대야성에서 딸을 잃은 김춘추는 김유신 장군과 협력하여 백제 멸망에 나섬으로써 개인적인 원한도 갚았고, 아들인 문무왕 때 결국 삼국통일을 이룩하였다.
 김무력 장군의 묘소가 영축산 자락 통도사 경내에 있는 것은 김무력 장군이 타계한 해가 579년으로 자장율사가 통도사를 창건한 646년보다 67년 전이어서 가능했다. 김서현 장군은 만노군 태수, 소판으로서 대양주 도독(大梁州 都督), 안무대양주제군사(安撫大梁州諸軍事)를 역임하였고 관등은 이찬에까지 이르렀다. 삼국사기 제43권 김유신 열전 하(下)에는 양주총관(良州摠管)으로 나온다. 김무력 장군의 아들인 김서현 장군은 양주 총관이 되어 여러 차례 백제와 싸워서 예봉을 꺾음으로써 변경을 침범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로써 변경의 백성들은 편안히 농사에 종사하였고, 나라의 근심을 덜게 되었다.
 김서현 장군과 그의 부인인 만명(萬明)을 그린 부부상 그림은 양산 신기리 신기산성 성황사에 모셨던 초상화로 20세기 전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2001년 5월 3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94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의 취서사(鷲棲祠)에서 보관하고 있다. 지역민들은 신기산성 성황사 사당을 중수하고 1년에 한 차례씩 제사를 올린다.
 백제 의자왕은 왕위에 오른 후 대대적인 신라 공략에 나섰다. 의자왕 2년(642) 7월에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 신라를 공격하여 미후성 등 40여 성을 함락시켰다. 의자왕 3년(642)에 윤충 장군을 내세워 신라 서부지역의 군사적 거점인 대야성(大耶城 : 현재의 합천)을 공략하도록 하였다. 윤충은 그해 8월에 군사 1만을 이끌고 신라의 대야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대야성 전투 때 숨진 고타소랑(古陀炤娘)은 신라 김춘추(金春秋)의 딸이었다. 남편은 이찬 김품석(金品釋)으로, 대야성의 군주(軍主)였다. 제27대 선덕여왕(재위 632~647년)이 즉위한 지 11년이 되는 해인 642년에 백제가 대야성을 공격하였다. 이때 품석과 그의 처, 자녀도 모두 죽임을 당하였다. 이 대야성 전투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와 백제본기는 물론 열전 중 김유신전(金庾信傳)과 죽죽전(竹竹傳)에 상세하게 남아 있다.
 죽죽은 대야주 사람으로, 대야성 도독 김품석의 휘하에서 보좌역을 맡고 있었다. 백제 장군 윤충(允忠)이 대야성을 공격하였을 때, 신라인인 검일(黔日)과 모척이 백제군을 도와 성안의 창고를 불태웠다. 검일은 예전에 자신의 예쁜 아내를 품석에게 빼앗긴 적이 있었는데, 그에 대한 앙갚음으로 적과 내통하여 배신하였다.
 대야성은 혼란에 빠졌고, 장군과 군사들은 사기가 꺾였다. 이때 품석의 보좌관 중 서천(西川)이 윤충에게 항복할 테니 목숨을 살려달라고 하였고, 윤충은 그러겠다고 하였다. 품석의 보좌관 중에는 백제를 믿으면 안 된다고 만류하는 이들도 있었으나 품석은 성문을 열어 신라의 병사들을 내보냈다.
 품석도 나가려다가 장수와 병졸이 모두 죽임을 당하였다는 얘기를 듣고는 먼저 처자를 죽이고,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죽죽이 남은 군사들을 수습하여 성문을 닫고 앞장서서 막았는데, 용석(龍石) 이 죽죽에게 이르기를 "지금 군세가 이렇게 되었으니 반드시 보전할 수 없을 것이다. 살아서 항복하였다가 후일에 공을 도모함만 같지 못하다"고 하니, 대답하기를 "그대 말이 당연하나, 우리 아버지가 나를 죽죽(竹竹)이라고 이름 지어 준 것은 나로 하여금 세한(歲寒)에도 퇴색하지 않고 꺾어도 굴하지 않게 함이다. 어찌 죽음을 겁내어 살아서 항복할 것이랴!"하고 힘써 싸우다가 성이 함락되자 용석과 함께 죽었다. 
 김춘추는 딸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였다. 비보를 듣고는 기둥에 기대서서 하루종일 눈도 깜박이지 않았고 사람이나 물건이 그 앞을 지나가도 알아보지 못하였다고 한다. 김춘추는 김유신과 함께 백제에 대한 원한을 갚을 것을 결의한 것이 『삼국사기』 5, 선덕여왕 11년(642) 조에 나온다. `아! 대장부가 어찌 백제를 삼키지 못하겠는가!` 그는 곧 왕에게 나아가 말했다. "신은 원컨대 고구려에 사신으로 가서 군사를 청해 백제에 대한 원수를 갚고 싶습니다." 왕은 이를 허락했다.
 김춘추는 647년 고구려에 가서 도움을 청하였으나 거절당했다. 고구려에 김춘추가 억류되자 김유신 장군은 고구려를 공격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놀란 고구려는 김춘추를 석방하였다. 고구려에 거절당한 김춘추는 당태종에게 군사를 요청하여 신라와 당 사이에 군사연합이 이루어졌다. 후에 김유신 장군이 백제와의 전쟁에서 크게 이기고는 사로잡은 백제 장군 8명과, 품석과 고타소랑의 뼈를 맞교환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제5권 신라본기 제5 태종 무열왕조(무열왕 7년 8월 2일)에 백제를 멸망시키고 원수를 갚은 내용이 나온다. 모척(毛尺)을 잡아 목을 베었다. 모척은 본래 신라 사람으로, 백제로 도망쳐서 대야성(大耶城)의 검일(黔日)과 함께 모의하여 신라의 성이 함락되도록 한 일이 있었기에 목을 벤 것이다. 또한 검일을 잡아 죄목을 따져가며 말하였다.
 "네가 대야성에서 모척과 모의하여 백제 병사를 끌어들여 창고를 불질러 없앰으로써 성 안에 식량을 모자라게 하여 싸움에 지도록 하였으니 그 죄가 하나다. 품석 부부를 핍박하여 죽였으니 그 죄가 둘이다. 백제와 함께 우리나라를 공격하였으니 그 죄가 셋이다." 그리고는 그의 사지를 찢어 그 시체를 강물에 던져버렸다.
 대야성 전투 승리로 백제는 신라 서부를 장악하였지만 나당연합군이 결성되어 백제와 고구려 멸망의 한 원인이 되었다. 대야성에서 김춘추의 딸인 고타소랑이 죽은 것이 원인이었고, 명분이었다. 김무력 장군, 김서현 장군, 김유신 장군 3대로 이어진 백제와의 전쟁이 끝났다.

심상도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ysnews090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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