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봉 등 독립운동가 집안
김구 선생 부인 최준례 여사 비문 작성

사진: 1916년 8월 15일. 앞줄 왼쪽 첫 번째 김두봉, 두 번째 스승인 나철)
사진: 기장 장관청. 명정의숙은 기장 유지들이 1910년 설립한 민족학교, 3.1만세운동 시위준비 장소로 김도엽 등이 면사무소 등사판을 가져와 독립선언서 인쇄와 태극기 깃발 등을 제작하던 곳이다.
사진: 조선어학자 김두봉이 출생한 기장읍 동부리 87번지 일대
사진: 조선어학자 김두봉이 출생한 기장읍 동부리 87번지 일대
사진: 상해 공동묘지에 묻힌 백범 김구 선생의 부인 최준례(崔遵禮) 여사의 묘비.조선어학자 김두봉이 순 한글 우리말로 쓴 이 빗돌 위에 잇는 부인은 그의 어머니 곽 씨(郭 氏.66), 모자 쓴 남자가 남편인 김구(金九.49)선생, 오른편에 있는 아이는 큰 아들 김인(金仁.5), 왼편이 둘째 아들 김신(金信.2)이다. 김두봉은 김구의 부인 최준례가 상하이 불란서조계 보경병원에서 사망하자 비문을 지어 보냈다. 비문에는 `ㄹㄴㄴㄴ해 ㄷ달 ㅊㅈ날 남, 대한민국 ㅂ해 ㄱ달 죽음`이란 순 한글체인데, 여기에 ㄹㄴㄴㄴ해 ㄷ달 ㅊㅈ날은 단기 4222년(서기 1889년) 3월 19일이고, 사망일은 대한민국 ㅂ해 ㄱ달은 대한민국 6년 1월이란 뜻을 담았다한다.

 김두봉은 한글학자로 조선어교육과 독립운동을 함께 한 언론인이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이었다. 자료의 의한 그의 약력은 다음과 같다.
 *저서
 [조선말본],[깁더 조선말본],[말모이](공저),[제주도실기](1922)
 보성고보[보성전문학교] 국어교사, 대동청년단 활동, 광문회 [청춘]편집
 국어학자 주시경 선생 밑에서 한국어를 연구와 조선어사전 말모이 편찬 참여,
 대종교 참여, 휘문고와 중앙고등보통학교 국어교사
 3.1운동 참여
 신대한신문[新大韓新聞] 편집위원
 대한민국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경상남도 대표]
 상해 프랑스조계에서 설립한 대한교육회의 편집국 국원
 인성학교 국어교사
 한국 독립당 비서장과 이사
 한국민족혁명당[조선민족혁명당]
 조선의용대 편집위원
 조선독립동맹 위원장 겸 조선의용군 총사령관 
 조선신민당 당수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위원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 참여
 김두봉은 평양에서 1946년 2월에 `북조선신민당` 당수, `북조선인민회의`에서 상임위원회의 의장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초대 국가수반의회 의장격인 인민위원회 상임위원회 위장(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겸 국가수반)이 되었다. 이것은 `조선신민당`을 조직하여 위원장을 지내던 중인 1946년 8월에 김일성의 조선공산당과 합당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북조선노동당 위원장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그리고 1946년 10월에 설립된 `김일성대학`의 초대 총장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1949년 남북협상에 북측대표로 참석했고, 1956년에 일어난 8월종파사건(김일성을 비난한)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1958년 3월 제1차공산당대표자대회에서 반혁명종파분자로 노동당에서 제명되면서 숙청된 것이다. 
 김두봉은 서울에서 결혼한 아내를 잃고,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다. 중국에서 올 때 못 데리고 온 큰 딸과 둘째 딸(김해엽-1941년생), 아들(김상엽-1943년)을 두었다. 그의 아버지 김돈홍은 엄격한 한학자였다.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영향으로 한문과 한학을 배웠고 누구보다 깊은 민족의식을 갖게 되었다. 일본의 침략에 대한 적개심을 갖던 김두봉은 아버지 김돈홍 밑에서 한문과 한학을 배우면서 일본인이 세운 보통학교에는 입학을 거부하였다. 
 선친의 영향으로 엄격한 민족의식을 갖게 된 그는 일제 교육을 받지 않았다.1917년에 그의 모교인 보성전문학교 국어교사로 초빙되면서 그해에 결혼을 했다. 이어 경성 휘문고등보통학교, 중앙고등보통학교 등의 국어교사로 초빙되기도 했는데, 1919년 3ㆍ1 운동에 학생들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시위에 참여하게 된다. 이 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일본헌병의 추적을 받게 됐고, 서울에서 이집 저집으로 은신처를 옮겨 다니다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결심하고 망명을 결행했던 것이다. 교사직을 사퇴한 그는 서울에 부인만 홀로 남겨둔 채 총독부 추적을 피해 안동현에서 상하이로 가는 영국화물선에 숨어 떠났던 것이다.
 상하이에서도 우리말 연구로 [신 대한신문] 편집위원을 맡았고, 그해 7월에 열린 제5기 임시 정부 임시의정원회의에서 경상남도 지역구 대표로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다. 그리고 10월에 상해 프랑스조계 내에서 설립한 대한교육회의 편집국에 일하다 이동휘 등을 통해 공산당에 입당하게 된 것이다. 
 
 지금껏 우리나라는 반공을 국시로 여겨 온 현재까지 남한에서도 북한에서도 잊혀져간 이름이다. 서로 기피하는 인물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우리말을 지켜낸 사람들 중의 소중한 한사람으로 길이길이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그는 학자로써 1922년에 1916년에 펴냈던 조선말본을 수정 보완한 [깁더 조선말본]을 상해에서 어렵게 출판했음에도, 그토록 오랜 정성과 노력으로 만들어진 책이 기대한 것만큼 사람들에게서 관심을 받지 못하자 그는 몹시 애를 끓이며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그 무렵에는 무장독립운동을 할 시간에 책이나 보고 있을 여유가 없다는 인식이 더 팽배해 있을 때였기 때문이었다. 
 학자로써 어쩌다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가 된 김두봉은 1924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에 선출되고, 그해 상하이 한인 교민학교 인성학교의 국어 교수로 초빙되기도 한 그는 1929년 한국독립당에 입당하여 한독당 비서장이 되었다. 1930년에는 한국독립당 이사가 되고, 같은 해 상해에서 개최된 11.3학생운동 1주년 기념식에서 도산 안창호 등과 함께 강연회 연사로 나서기도 했다. 
 1932년 10월 12일 상해 민국로 동방여사에서 한독당의 이유필, 송병조, 조선혁명당의 최동오 한국혁명당의 윤기섭, 신익희, 의열단의 한일래, 박건웅 한국광복동지회 김규식 등 9명과 함께 모여 중국에 있는 각 독립단체간에 통일전선을 결성하기로 하고, 모든 독립단체들이 수차례의 모임을 한 끝에 민족유일당 설립을 결정하였다. 
 1935년 조카사위가 된 김원봉과 함께 한국민족혁명당을 결성하고 1935년 민족혁명당 중앙 집행위원을 맡기도 했다. 이무렵 김규식이 총재였고 김원봉은 서기, 김두봉은 민족혁명당 중앙집행위원 겸 조직부장이 되어 내무부장 겸 선전부장까지 역임하였다. 
 1937년 1월 한국민족혁명당은 다시 조선민족혁명당으로 당명을 바꾸고 중경으로 간 김두봉은 한 때 아나키스트 계열 독립운동가 김진익과 사상적 동지가 되기도 했다. 김두봉이 아내를 사별 후 만난 여성과 김진익의 관계가 드러나 김두봉은 그들 모두를 결별했다. 그리고 또 중국 국민당의 지원을 받는 김규식, 김원봉의 노선에도 불만을 품고 충칭을 떠나 1940년 화북에서 조선독립동맹의 주석으로 추대된다. 
 1942년 7월에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의 최고책임자와 통수권자를 맡았고, 팔로군과 연계하여 일본군과 싸우면서 얻게 된 별명이 `태항산호랑이`였다. 광복이 되고 북조선으로 귀환, 1948년 4월의 남북협상에 참여하였고 북한의 인민위원회 상임위원장 등을 역임했던 것이다. 
 [김두봉론]을 쓴 역사학자 이청원은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고 한다. 
 "김두봉은 전투적 정열의 지도자이기보다도 학자형의 냉정한 의지의 지도자이다. 금일 조선의 지도자들 중에서 민주주의자나 사회주의자를 막론하고 다 같이 존경과 기대를 가지고 있는 분이 있다. 그분은 김두봉씨를 제일로 칠 것이다"
 (위클리경향 2009.5.19)
 김두봉의 집안과 주변사람들이 모두가 독립 운동가들이였다. 
 염화[암살]의 의열단 단장인 김원봉은 박차정의 남편으로 조카사위이다. 박차정의 어머니인 사촌 누이(김맹련), 사촌 매부(박용한), 외당조카(박차정), 그리고 박차정의 오빠 박문희(독립운동가), 박문호(독립운동가)와 매부 박용한의 동생 박일형(독립운동가), 김두봉의 6촌 동생인 김약수(본명 김두전), 등 사돈까지도 주변사람들이 모두 독립운동가 들이다.  
 영화 [암살]의 의열단장 김원봉의 아내인 박차정은 김두봉의 조카딸로 910년 5월 경남 동래군 복천동 417번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박용한과 어머니 김맹련의 3남2녀 중 넷째였다. 일제에 국권이 강탈되기 직전인 1910년 5월에 태어나 광복되기 직전해인 1944년 5월에 생을 마감할 때까지 34년을 일제와 투쟁했다. 
 박차정의 아버지 이자 김두봉의 매부인 박용한은 일찍부터 신문물에 눈을 떠 구한말 동래 지방의 신식학교인 개양학교를 나와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했고, 탁지부 주사를 역임한 측량기사이기도 했다. 을사늑약 경술국치와 일제의 무단정치에 비분강개하여 여느 지사들처럼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다. 
 박차정은 김원봉의 아내로 널리 알려졌으나 김두봉의 조카라는 사실은 그리 알려져 있지 않다. 일테면 조선어학자 김두봉의 조카인 박차정은 이처럼 민족의식이 강한 집안에서 태어나 근대적인 교육을 받았던 것이다. 신여성의 열린 삶을 행복하게 누렸을수도 있었던 여성이 한 생애를 일제투쟁에 몸 바친 민족운동가 이었다.
 지금 현재 부산의 동래여고인 일신학교를 졸업하고 일제 때 여성 민족운동 단체인 [근우회]중앙위원으로 민족운동을 하던 중에 1931년 중국으로 망명했다. 여기서 의열단 단장인 김원봉과 결혼하여 함께 조선의용대 활동을 한 것이다. 
 남부러울 것 없는 가정에서 신지식인 가장이 그렇게 떠나자 이후 어머니 김맹련 여사는 5남매를 키우고 가르치기 위해 삯바느질로 생계를 꾸리며 지냈는데, 한 일화로 만세를 부르다 감옥을 들락거리는 자식들 때문에 속상한 어머니가 딸에게 "니 오라들은 그렇더라도 너는 딸아이잖아. 여자가 시집이나 갈 일이지, 온 집안 식구들이 다들 이러고 다니니, 남 보기 부끄럽고 민망하다."고 하자 소녀 박차정은 단호하게 "저는 그렇게 말씀하시는 어머니가 저는 더 부끄럽습니다."고 했다는 것이다. 
 박차정의 어머니인 김맹련은 동래군 기장사람으로 약산 김원봉과 의형제였던 약수 김두전과는 육촌이었고, 김두봉과는 사촌이었다. 
 이런 집안의 가계만으로도 충분히 강한 사상적 배경을 가진 어머니 임에도 딸자식만큼은 험난한 생을 살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배경이 박차정 역시도 주변 환경에 의해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식민지의 부당함을 바로 볼 수 있는 안목과 의식을 갖출 수 있었던 것이다. 


박정애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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