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장읍 동부리 출신 독립운동가 한글학자 백연 김두봉,
3ㆍ1 운동 이후 중국으로 넘어가 항일전투 치르며 한글연구
김일성대학 초대총장, 노동당위원장과 최고회의 상임위원장
북한은 [반동분자], 남한은

 한글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백연(白淵) 김두봉(1889년 3월 17일-?)이 가까운 기장 사람이란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울산 출신인 우리말 지킴이 외솔 최현배 선생과는 다섯 살 차이로 김두봉이 더 많다. 한글학자들 중에서도 이들 두 사람은 주시경 선생의 수제자들로 울산과 기장이라는 출신지가 가까워서인지 유난히 친했다고 한다. 
 8.15광복 후 그의 6촌 동생인 김약수는 국회부의장을 지냈고, 기장 대변에서 의사였던 김형기 씨와는 외사촌 간이다. 그리고 밀양출신 독립운동가 의열단 김원봉의 아내이자 독립운동가인 박차정 여사의 어머니와는 사촌간이다. 
 김두봉은 1889년 2월 16일 부산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 87번지에서 김돈홍의 장남으로 태어나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웠다. 일본인이 세운 보통학교도 들어가지 않았다. 청년이 되면서부터는 신학문에 눈을 떴다. 1908년 서울로 올라가 안국동에 자리를 잡고 보성고등학교와 배재학당에서 공부를 했다. 그는 이때부터 애국청년단원인 서상일, 박중화, 윤세복, 남형우, 김동삼 등과 비밀단체인 대동청년단을 조직하여 활동을 했다. 1913년 대동청년단원들이 일본경찰에 체포되면서 그는 학업을 중단하고, 육당 최남선이 운영하던 조선광문회에 들어가 한글을 연구하며 잡지 [붉은 저고리]와[청춘]을 편집하는 일을 했다. 
 이때 주시경 선생이 국어를 가르치는 강습소 야간반에 들어가 선생의 수제자가 되어 국어사전 [말모이] 편찬에 참여하였다. 주시경 선생은 우리의 언어가 민족의 얼과 혼이라고 가르쳤다. 이듬해 스승인 주시경 선생이 갑자기 병사(1914년 7월 27일)하자 그 뜻을 이어 한글 국어사전 세로쓰기 [조선말본]을 1916년 4월에 완성하였다.  건국시조인 단군을 모시는 단군교인 민족대종교인들은 나철 신채호 등, 대체로 독립 운동가들이 활동했듯이 김두봉 선생도 대종교에 입교하여 민족혼을 되살리는데 힘썼다. 
 1917년에는 모교인 보성전문학교 국어교사로 초빙되었다. 1905년에 세워진 조선 최초의 근대적 고등교육기관인 보성전문학교(고려대학교 전신)는 대한제국 광무 9년에 당시 대한제국의 황실재정을 담당하는 대장원경대신인 이용익(보부상에서 광산업자로 거부였던)의 사제와 고종황제의 재정적 후원으로 세운 학교이다. 
 보성전문학교 이후 휘문, 중앙 등의 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쳤다.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 학생들과 함께 독립선언문을 배포하는 등 시위에 적극 참여하여 수배인물이 되었다. 이때 그는 서울에서 숨어서 지내다 독립운동을 결심하고 중국으로 망명을 결심한다. 안동에서 상해로 가는 영국화물선을 이용하여 중국 상해로 들어가는데 성공하였다.  
 망명지인 상해에서도 독립운동과 국어연구를 했고, 신채호가 주필로 있던 [신대한신문]편집위원으로 일하면서 김규식과 더불어 신한청년단원으로 활동하는 한편 임시정부 의정원에 선출되기도 했다. 이 무렵 [깁더 조선말본]을 출판한다. 깁더란 `깁고 더한`다는 뜻인데 요즘 시각으로 보면 개정판이나 수정본인 셈이다. 
 이 무렵에 이동휘, 박용만, 노백림, 이동녕 등을 중심으로 한 공산당에 입당하여 총무국간부로 활동하게 된다. 1924년 백범 김구 선생의 아내 최준례가 사망하자 순 우리 한글로 묘비명을 지어 보내주었다. 그리고 1928년 고려 공산당이 해산되고 이후부터는 대한독립당 성립추진위원회에 참가하여 도산 안창호를 중심으로 한 각파 혁명이론 비교연구회에 몸담아 국가건설과 혁명이론을 연구하였다. 
 1929년 10월 31일 결성한 [조선어사전 편찬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1930년 무렵에는 한글연구의 기초를 닦은 한글연구계의 거장으로 평가받고 있었다. 1935년 4월 [동아일보] 창간 10주년 기념사업에서 최현배, 이윤재, 이상춘, 권덕규 등 8명과 더불어 `조선어문 공로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리고 1934까지는 상해교민단체 자녀들의 교육을 위한 인성학교 교장을 지내기도 했다. 
 1937년 남경이 일본군에 함락되면서 민족혁명당 당원들과 중경으로 자리를 옮겼다. 여기서 김두봉은 이제는 나라를 찾기위해선 전투가 우선이라는 신념을 갖게 된다. 그는 총을 들지 않고는 싸워 이길 수 없다는 의지로 의용군이 모여 있는 팔로군에 들어간다. 팔로군에 들어간 김두봉은 각종 고된 군사훈련과 지도력으로 부사령관이 된다. 1942년 5월 연안의 태황산에서 일본관과의 전투에서 뛰어난 전투력으로 이때`태황산 호랑이`란 별명으로 불리게 된다. 
 1942년 7월 10일 김두봉은 사회주의자로 국민당 지원을 받고 활동하는 김원봉 조선의용대(의열단)에서 탈퇴하여 중국 공산당 모택동부대 연안으로 벙어리 행세를 하며 행군과 도착하여 김무정(중국 공산당 당군 팔로군 포병지휘관. 임표, 팽덕회 지원으로 화북조선쳥년회 조직), 최창익등과 조선독립동맹을 결성했다
 이때 김두봉은 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의 최고책임자와 통수권자로서 독립동맹은 정치단체로 하고, 의용군은 군사단체로 조직했다. 김두봉을 신민주주의(인민 민주주의) 혁명 노선 모택동 부대라고 지칭했다. 독립동맹에는 김두봉(주석), 최창익(부주석), 김무정, 허정숙 등 이었는데, 중국 공산당 당군 팔로군 총사령관 주덕은 조선의용군 영웅적인 투쟁과 희생을 보고 조선의용군 전사들의 전투정신은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싸우는 중. 조 인민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라고 치하했다고 한다. 그리고 김두봉은 주은래와도 아주 친했다고 한다.
 1944년 10개의 독립동맹 연맹과 의용군 지역지대를 설치하는 등 세력을 확장하였으며, 김두봉은 독립동맹의 주석으로 중국 공산당과도 연계, 공산당의 군대인 팔로군과 연대하여 일본군과 싸웠다. 44년 연안(延安) 한인촌의 조선청년학교 교장이 되었고, 1945년 2월 김두봉은 조선청년학교를 군관양성소로 개조하여 조선혁명군정학교로 고치고 다시 교장으로 취임하면서 8.15 해방직전까지 노력하였다.
 1945년 광복후 의용군 4개 대대를 인솔하여 12월에 평양에 도착했다. 연안에서 평양까지 이르러 무려 4천 7백리를 4개월을 걸었던 것이다. 1946년 2월 독립동맹을 개편하여 `조선신민당` 북조선인민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출 제2인자가 되었다. 1946년 8월 `조선신민당`이 김일성의 노선인 `조선공산당`과 합당하게 되었고, 이후 `북조선노동당`이 되었다. 김두봉은 `북조선노동당`위원장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맡게 된다.  
 1946년에 10월에 `김일성대학`이 설립되면서 초대 총장이 되었다. 정치보다 이론과 학문에 밝은 그가 학계에서 연구에 몰두하는 것이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1948년 9월 인민위원회 상임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되었고,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한국전쟁에 중국이 참전하는 과정에서 북한 내 중국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연안파의 발언권이 높았다. 1952년 이때 북한에서의 김두봉 위상은 그 어느 때보다 높아 입법부와 행정부를 대표하는 당대표자로써 신년사를 발표하는 정도였다.
 1956년 연안파 간부들이 당중앙회 전원회의에서 당 운영방식과 김일성 개인숭배에 대한 불만을 토론하게 된 `8월 종파사건`이후로 연안파는 몰락하기 시작한다. 사건 발생 후 반혁명종파 분자로 분류되면서 연안파였던 김두봉은 물론 최창익, 서휘, 그리고 국내파로는 박헌영 등이 숙청되었다. 백연 김두봉은 75세 전후로 하여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령을 이유로 사형은 면했다고 하는데 아마도 오지의 협동농장으로 추방되어 언제 죽었는지도 모르게 죽었다는 설로 떠돌고 있다. 이로부터 독립운동가이자 혁명가 교육자인 김두봉의 존재는 지워졌고 `태항산 호랑이`전설도 사라졌다.        
 해방조국 돌아와 평양을 선택하여 북한정권 합류한 김두봉은 북한 언어정책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주시경이 기틀을 놓고 조선어학회가 계승한 형태주의 원칙인 신철자법과 기본적으로 가로쓰기를 해야 한다는 정책과 조선인은 오직 한글로만 언어생활을 해야 한다는 정책이 북한에서 실시된 것이다.
 그렇게 북한을 선택한 김두봉에 반해 최현배는 서울을 선택하고 조선어학회를 재건해 남한 언어정책의 토대를 구축했다. 해방 후 주시경 학파가 주도한 한글운동의 핵심은 한글 전용과 가로쓰기에 어휘 형태소의 기본형을 고정해 표기하는 형태주의 문법으로 정리된다. 그 후 남한과 북한의 한글정책은 변화가 있었지만, 한글 가로쓰기라는 근간은 흔들리지 않고 있다. 
 이렇게 남한과 북한이 같은 언어 정책을 갖게 된 것은 주시경 문하 두 한글학자의 역할이 컸을 뿐만 아니라 우리 동부경남의 기장 출신의 김두봉과 울산 서생출신의 최현배 선생의 공로가 컸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할 것이다. 
 북한에서 중요한 요직을 거치며 지내다가 불행하게 숙청을 당한 김두봉의 노력으로 
 남과 북의 그 수많은 기념일 중에도 유일하게 같은 날, 같은 명칭을 쓰는 날이 우리의 [한글날]이라는 것도 주목할 부분이다. 그가 태어난 부산 기장읍 동부리 죽성천변의 생가 터에는 갈대가 우거지고 기림비석 하나 없는 밭으로 방치돼 있지만 언젠가 우리나라가 통일된 하나의 조국이 된다면 다시 그의 이름을 부르게 될 날이 있을 것이다.  

 -계속- 

박정애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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