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도[동남문화관광연구소장.관광경영학 박사]

 양산읍성의 복원에 참고할 수 있도록 경남 사천시의 사천읍성을 답사하였다. 외적을 막기 위해 쌓은 사천읍성은 사천읍 정의리 일부와 선인리에 걸쳐 있으며, 사천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조성된 수양공원 일대를 포함하는 전 지역이 옛 읍성지다. 사천읍성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사천읍 경관과 달맞이가 무척 아름다워 사천팔경 중 제 7경이 `사천읍성 명월`이다.
 사천의 옛 이름이 사물(史勿), 사수(泗水), 동성(東城) 등이었는데 조선 태종 때부터 사천이라 하였다. 세종 24년(1442)에 영의정 등이 주청해서 이곳에 돌로 성을 쌓기 시작하여 3년 후(1445)에 완성하였다. 성문은 동문, 서문, 남문이 있었는데 재양문(載陽門), 숙금문(肅金門), 주안문(朱安門)이라 하였다. 성 안에는 동헌인 부경헌과 객관, 제경루(齊景樓), 침오정(枕鰲亭) 등 많은 공공건물, 민가, 시장이 있었다. 사천읍성은 순조 때까지 성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으나 성벽과 시설물이 급격히 훼손되어 산 부분만 겨우 읍성터로 남아있게 되었다. 
 사천읍성(泗川邑城)은 경상남도 지정 기념물 제144호로 조선 세종 24년(1442)에 병조참판 신인손(辛引孫)이 왕명에 의해 성을 쌓았다. 4년 뒤 봄에 공청(공무를 보는 집) 등 모든 건물을 짓고 읍(군청)을 정동면 고읍에서 옮겼다. 처음의 기록에는 성 둘레 3,105척(자), 성벽의 높이 10.5~11.5척, 성문과 옹성이 각 세 곳이라 하였다. 그 후의 기록에는 성 둘레 5,015척, 성벽의 높이 15척, 성가퀴 630곳, 성문 및 옹성이 각 세 곳에 있다 하였다. 이로 미루어 초기에 추가하여 증축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천읍을 중심으로 사천현의 경계가 동쪽으로 23리, 서쪽으로 5리, 남쪽으로 25리, 북쪽으로 6리, 서울까지 973리였고, 세종시대 인구는 370호 1,817명이었다. 당시는 농업과 어업이 중심이어서 성 안 시장에 농수산물과 공물로 보내는 인삼 등이 출하되었다. 사천이 내려다보이는 읍성에서 문인들은 눈을 들어 멀리 지리산으로부터 금오산, 니구산 등을 노래하였고, 눈을 내려 바다물결의 출렁거림을 읊었다고 한다.
 백성을 보호하고 외적을 방비하기 위해 쌓았으나 임진왜란 때 함락되는 아픔을 겪었다. 조선시대 선조 32년(1598) 9월 28일에는 병사(兵使) 정기룡(鄭起龍) 장군이 이끄는 조선군과 명나라 원군이 연합하여 이 성을 탈환하기 위해 혈전을 벌인 끝에 왜적을 몰아냈다. 전투 와중에 명나라의 유격장 노득공(盧得功)이 전사하였다.
 사천읍성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복원되기 시작한 것은 사천시의 한 향토사학자의 열정에서 비롯되었다. 사천 향토문화발전연구원 변윤수 회장은 사천시민의 정체성 회복과 문화재 원상 복원 차원에서 사천읍성에 관심을 갖고 연구를 하였다. 변윤수 회장은 지난 2005년부터 사천읍성이 역사적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잘못된 이름으로 불리는 현실이 안타까워 이 일에 뛰어들게 됐다고 한다. 그는 지역 향토문화 발굴과 보존에 온 힘을 다하였다. 옛 선조의 혼이 고스란히 서려 있는 역사의 현장을 내버려 두는 것은 정말로 부끄러운 일이라고 여겼다.
 변 회장에 의하면 일제 강점기 일본의 문화말살 정책으로 사천읍성을 허물고 산성공원으로 둔갑시켰다고 한다. 사천읍성에 서려 있는 사천 주민의 정체성을 말살하고 민족의 혼을 단절시켜 구심점을 없애기 위해서 그런 만행을 저질렀다. 사천시민들이 이러한 일제의 역사적 배경을 모르고 산성공원으로 부르는 것은 우리의 혼을 스스로 짓밟는 행위나 다름없다고 하였다. 사천읍성 복원사업 출발은 그의 생각, 열정과는 달리 쉽지가 않았다고 한다. 무엇보다 읍성에 대한 역사적 가치를 모르는 사람들의 잘못된 인식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이런 과정에서 복원사업에 뜻을 같이할 수 있는 사람들을 찾았고, 이들과 함께 사천읍성 복원추진위원회도 만들었다. 수차례 사천시를 방문, 사천읍성 복원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협조를 요청한 끝에 적은 예산이지만 매년 복원사업비를 지원받기로 했다. 처음에는 사천시가 매년 지원하는 1억~2억 원의 사업비로는 성곽 복원이 지지부진하였다. 이런 식으로는 사천읍성 전체를 복원하려면 수십 년이 걸릴지도 몰라 안타까워하였다. 변 회장은 지역의 정체성 회복차원에서 성곽 복원에 이어 사천읍성의 사대문 중 동문만이라도 우선 복원하고, 장기적으로는 진주성을 모델로 새롭게 변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재)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에서 2006년 7월 13일부터 11월 30일까지 사천읍성 동문지 발굴, 체성 기단부, 치성부, 등성시설 등을 확인하였다. 2010년 사천시에서 사천읍성 복원 및 수양루 해체 외 4건의 사업에 4억 8천 1백만 원의 예산을 투입하여 도지정문화재를 보수 정비하였다.
 사천 지역민의 공원으로 이용되며, 10년째 성곽복원작업이 진행 중이다. 주민들이 사천읍성을 찾아 걷고 있는 산책로 옆에는 성벽을 지탱하는 돌들이 어긋나있고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아슬아슬하다. 타원형 모양으로 불쑥 튀어나와 있는 성벽 가운데에는 `언제 무너질지 모르니 조심하라`는 안내판이 붙어있다. 사천읍성에 매일 산책 운동하러 나오는 주민들은 지나갈 때마다 불안하다고 한다.
 흔히 성을 성곽이라고 하는데 이를 엄격히 말하면 성(城)과 곽(郭)으로 구분된다. 성은 내성(內城)이며 곽은 외성(外城)이다. 성곽에는 성벽이 있고 성문이 있고, 성곽 주위에 물이 흐르는 해자라고 하는 외부침입을 막는 장애물이 있다. 성벽에는 배수로인 누조가 있고, 성벽 맨 위에는 외부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한 여장이라는 것이 있다. 성벽의 일부분을 밖으로 돌출시켜 적을 공격하기에 효과적인 치가 있다.
 일제가 우리나라의 문화와 역사를 없애기 위해 우리나라의 성을 허물어버리자 성벽을 쌓았던 돌들을 주민들이 많이 가져가서 집에 담을 쌓을 때 많이 사용하였는데, 사천읍성, 양산읍성도 마찬가지였다. 사천읍성은 복원과정에서 고증을 제대로 거치지 않아서 옛 읍성의 위용이 사라지고 있어 문제라고 한다. 어떤 곳은 성벽 밑에 작은 돌이 있고 오히려 위에 큰 돌이 얹어져 있는 형태로 보기에 불안정하다. 새로 축조되는 성벽은 여장도 없고 누조도 없고 규격화된 돌이 아니라 문제가 많다.
 양산읍성을 복원할 때도 사천읍성의 시행착오를 거울삼아 먼저 발굴조사를 하고 역사적 기록에 근거하여 고증을 거친 다음 복원해야 하겠다. 양산읍성의 복원이 장기간에 걸쳐 많은 예산이 소요되므로 읍성길 주변에 읍성 관련 벽화를 그리고 표지판도 세워서 홍보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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