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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②광양매실 농가 탐방
매실은 광양, 광양하면 매실이다
홍쌍리씨 청매실농원, 년간 40억 원 매출
청매단, 캔디, 젤리, 감매, 정과 등 상품화
광양시, 매실특작과 두고 매실농가 지원해
광양매화 문화원 상설 운영으로 위상 제고

 본지는 침체 일로에 있는 양산 원동매실을 주제로 매실 농가의 활로 모색을 꾀했다. 양산 원동매실의 오늘과 내일을 짚어 보는 기획취재는 전라남도 광양시의 매실 농가를 탐방한 후 4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 주
 

홍쌍리 청매실 농장 대표

 매실은 광양, 광양하면 매실이라고 한다. 이는 전남 광양 매실이 그만큼 유명세를 타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광양에서 매실하면, 홍쌍리(여,76)씨의 청매실농장이다. 이곳은 년간 약 100여만 명의 관광객들이 찾아 오는 유명 관광지이기도 하다.
 전남 광양시 다압면 지막 1길 55 일대에 온통 초록색으로 펼처진 약 6만여평에 달하는 매실농원이 바로 홍 씨의 청매실농원이다.
 중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홍 씨가, 지금은 중견기업인으로 성장하고, 우리나라 최초로 매실 장인(匠人)으로 선정된 이면에는 나름대로 수 많은 고난과 시련이 있었다.
 경남 밀양이 고향인 홍씨는, 당차고 영특한 아이로 태어났지만, 아버지의 남아연호사상 때문에 중학교를 가지 못하고, 아버지의 요구로 열여섯살때부터 부산 국제시장에서 일을 했다.
 이곳에서 훗날 시아버지가 될 김오천(작고)씨를 만나, 1965년 지금의 광양 백운산으로 시집가서 농원의 안주인이되었지만, 그로부터 30여년간을 건강과 경제적 어려움, 남편의 병 수발로 시련의 나날을 보냈다.

▶흙물, 풀물이 깨긋이 지워지는 것을 보고 매실의 매력에 푹 빠졌다.
 하지만, 하루도 빠짐없이 매실 연구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 매실나무 가꾸기에서부터 매실 수확, 매실 먹거리 등의 연구로 거의 질식상태에까지 가기도 했지만, 매실에 대한 연구는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시련과 고난을 견뎌냈다. 힘들고 서러울 때면 한밤중에도 매화꽃과 야생꽃들에 편지를 쓰면서 울기도 참으로 많이도 울었다.
 십 수년전만해도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매실이 지금처럼 우리곁에 자리하도록 만든 사람이, 바로 나 홍쌍리이다, 어느 누가 뭐라해도 내 자신이다라고 자부한다.
 시아버지한테 배운 것을 더 발전시키려고 장아찌도 만들어 보고, 고추장에도 넣어 보느라 잠자는 시간을 쪼개기도 했다. 매화나무를 심어 5년이 지나면 꽃이 피고, 10년 뒤에는 수확이 생기겠지, 또 20년이 되면 사람들이 찾아오겠지라는 그런 꿈 같은 생각을 참 많이도 했다.
 이런 생각으로 열심히 매화나무 가꾸기를 했지만, 돈 고생, 마음 고생으로 이전보다 더 힘 들었다. 이런 일로 낮은 곳에 있던 비옥한 땅은 다 없어지고, 악산만 남아 가파르고 거친 악산에 밤이든 뭐든 재배해서 식구들 입에 풀칠하며 빚을 갚아야 하는 세월은 기약도 없이 계속 되었다.

▶매실 1만구로 시작해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더라, 일본 탄광에서 일하시던 아버지가 10년 넘게 번 돈으로 다른 사람들이 논을 살 때 아버지는 산을 샀지, 특히 눈살미가 좋은 아버지가 일본에서 매화나무 1만주를 가지고 와서 심었다.
 매실은 약용으로, 밤은 식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가져온 것인데, 당시 우리나라 매실은 선비들이 정원수로만 심었다. 아버지는 3년 뒤 노환으로 돌아가셨지만,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매실나무를 잘 가꾸기로 각오하고 매실나무 가꾸기에 총력을 다했다.
 이후 수확한 매실을 부산 대선소주에 137만 원을 받고, 납품을 하게 되었고, 그때 나온 매실주가 홍실주인데 그게 바로 우리 매실로 만든 매실주다.
  내 가 직접 담근 매실주도 내주고, 매실 장아찌로 반찬해서 내주고, 갈 때는 다른 사람들과 나눠 먹으라고 또 주곤 했다.
 즉 나는 도시에 없는 것을 주고, 그들은 촌에 없는 것을 준 것이 바로 돈이다. 이게 바로 내 사업의 시초라고해도 과언이 아니지, 또 찾아오는 이들에게 닭백숙을 팔았는데, 이때 한 접시에 매실 반찬만 담아 동그란 접시 한 가운데 감로매를 놓고 주변에 돌아가면서 빨간 고추장 장아찌, 녹색 절임, 정과를 담아 내놓았다.
 감매는 쪽을 내지 않고, 온 것을 동그란채로 소금으로 절였다가 나중에 단 맛을 넣어 만드는데 아삭하고 맛이 있지, 절임은 육 쪽을 내어서 만든 것이고, 맛이 비슷할 것 같아도 서로 다른 맛이 난다. 그랬더니 불티가 나는 거야, 손님들이 매실 고추장 장아찌를 종이컵에 모아두고도 다 먹고 없다며 더 달라고 난리를 쳤다.
 손님 세분이 오면, 매실주 두병을 공짜로 줬다. 두분이 오면, 한병을 주곤했는데 서비스로 그냥 한잔을 주면 마시고 또 더 달라고 해 술이 더 없다라고 했다. 그러면 다음에 오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그라므 마 오지 말라고 했지, 그래서 한때는 배짱장사라고 소문이 나기도 했다.

▶소금은 5년동안 간수를 뺀것을 사용해야한다.
 사실 그때는 매화가 돈이 안되니까 얼마 안 심었어, 약으로 쓸 정도만 심었지만. 1950년대초부터 년간 30톤 정도를 수확하여 구례. 순천, 하동의 한약방에 공급했어, 매실은 너무 시어서 그냥 먹을 수가 없으니까 금매와 오매로 만들었다. 
 금매는 매실을 살짝 쪄서 말린 것인데, 술을 담그면 색도 예쁘게나고, 맛도 참 좋아, 오매는 매실을 짚불연기에 살짝 그을린 것인데 가래 삭히고 이질, 폐결핵 치료 약으로 많이 팔았다.
 오매 만들고 나머지 매실로 농축액하고 건매를 만들었다. 건매  한 주먹에 인삼 두 뿌리 넣고 삶은 물은 하루에 두 번, 삶은 달걀과 함께 먹으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매실은 그냥 두면 상해버리지만, 농축액으로 만들어 두면, 오래 오래 보관할 수 있고, 오래 숙성된 것은 약효가 아주 좋다.
 원래 나의 목표는 우리들 밥상에 어떻게든 매실을 올리는 것이였다. 나는 목표를 하나 정하면, 끝까지 가는 성질이다, 처음 매실장아찌를 만들기 위해 1년짜리부터 7년짜리까지 다 실험을 해 봤는데, 매실 장아찌는 5년짜리가 딱 알 맞는 것 같아, 매실장아찌에 쓰는 소금은 간수를 5년 뺀 것이다, 이런 소금은 손에 쥐어도 소금이 붙지 않아, 약간 짜면서도 단맛이 난다. 소금을 많이 넣으면 장아찌가 꼬들꼬들하니 좋긴 좋은데 뭔가 아쉬운 기라. 그래서 설탕을 함께 써보면 어떨까 생각했는데 그당시 설탕이 너무 귀해 설탕을 구한다고 고생을 많이 했다.
 1971년 막내를 출산하고 두 번이나 큰 수술을 받았다. 그 이후로 몸이 많이 아파서, 울면서 일을 했다. 그때 한번은 오매를 사러 온 한의사가 발밑에 좋은 약재를 두고도 왜 모르냐면서 고기를 일체 먹지 말고 쑥뜸을 뜨면서 매실을 장복하라고 권유 했다.
 그때부터 2년 반 동안 매실물을 꾸준히 마셨더니 팔다리가 좀 편안해지다 어느새 거짓말처럼 병이 나았다. 이때 매실의 효능을 체험하고부터는 매실연구에 더 매진했다.
 내가 직접 매실을 먹고 병이 나았으니까 아픈 사람들을 만나면 무조건 공짜로 매실액을 나눠줬어, 이런 일이 한두번이 아니고 계속되다 보니 이제는 매실사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전통식품 허가 내가 내
 매실액을 공짜로 나눠준다는 소문을 듣고, 그당시 MBC에 근무하던 김 실장이라는 사람이 찾아와 만들어 놓은 매실 농축액이 얼마나 있느냐고 물었서, 그래서 나는 큰 항아리 가득한게 여러개 있다고 하자, 지금처럼 여러 사람들에게 공짜로 주지 말고, 상표등록을 하여 사업을 하는 것이 어떻게냐며, 허가를 받아 매실먹거리를 만들어 보라고 제안 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바로 매실과 농축액, 발효원액, 장아찌, 녹색 절임, 정과, 감로매를 보따리에 싸 가지고, 군청으로 갔제, 그런데 군청 공무원들이 매실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고, 전례도 없어 허가를 내 줄 수 없다고 했다.
 이때문에 몇 개월 동안 허탕을 쳤다, 그래서 한번은 이대로 있을 수 없다는 생각으로 군수실로 바로 처 들어가서 그 자리에서 젊은 군수에게 그동안 내가 연구하고 개발한 매실에 대해 설명을 하니까 군수가 바로 직원을 불렀어 그런데, 그직원들이 또 전례가 없어 허가를 내 줄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러자 군수가 그 자리에서 바로 그걸 만들어내는 게 바로 여러분 일 아닙니까라며 버럭소리를 질러서 그자리에서 일사천리로 전통식품업체로 지정 받았다.
 전통식품업체로 지정은 받았지만, 이제는 판로(판매) 문제로 고민을 많이 했지, 이때 마침 순천에 새로운 성당을 지을 자금을 마련하는 바자회를 하는데 이때 팔매할 마땅한 물건이 없다며 소문을 듣고 찾아왔으니 매실농축액을 좀 팔면 안되겠느냐고 해서 그자리에서 바로 좋다고 했다.
 그런데 얼마나 필요할까라고 하자, 300그램짜리 병으로 3000만 원어치를 마련해 달라는 거야, 내가 깜짝 놀라서 다시 물었어 300만 원이 아니고, 3000만 원이라고요 하니 맞다는 거야, 그래서 그날 준비한 매실농축액 3000만 원어치를 다 팔았다.
 이날 매실농축액을 사 간사람들이 먹어보고 좋으니까 얼마 후 그사람들과 그주변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 오는 거야, 그때부터 우리 청매실농원이 전라도는 물론 전국적으로 알려지기 시작 했다.

▶매실농축액은 자연이 준것에 정성을 다 해야
 이후부터 방송에도 나가고, 신문이란 신문에는 다 실리기 시작해 영화(취화선, 다모, 바람의 파이터, 흑수선, 봄의 왈츠)도 촬영하고, 청와대도 가고, 표창과 상장, 감사패를 많이 받았지. 또 신지식인과 명장이 된 것이다. 
 사실 매실농축액을 만들려면 절구통에서 씨앗을 빼고, 맷돌에 갈고, 삼베로 팔목이 아프도록 짜서 술단지에 넣고, 사흘을 고아야 한다, 농축액을 고을때는 내 혼을 다 불어 넣는다, 자연이 만들어준 것에다 사람의 정성을 더 해서 그렇게 어렵게 만든 귀한 걸, 처음 서너병(세병)을 만들어 팔 때 퇴짜를 맞기도하고 반품을 받는 등 실패도 많이 했다.
 낮에는 매실을 따고 오후부터 매실공장에서 매실을 씻어 칼로 다듬고, 절이고, 끊이다 보면 꼴딱 밤을 새게 되는 경우도 허다 했다. 
 매실은 하루만 그냥 두면, 변해버리니까 덮어 두고 쉴 수가 없어, 장아찌 만들 때 조금 큰 매실은 여덟쪽으로 자르고, 작은 것은 여섯쪽으로 예쁘게 반달 모양으로 한다, 이렇게 일을 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칼을 그냥 손에 쥐고 잠을 자다 깨면 손에서 피가 난 경우도 많았다.

▶꼭 옛날 항아리를 쓰야된다 .
 어떤 사람들은 매실을 프라스틱통에 담그는 경우도 있다는데 매실은 절대 프라스틱통을 쓰면 안된다, 매실은 반드시 항아리(독,단지)에 담그야 한다.
 그래서 나는 어디 옛날 항아리가 있다는 소문을 들으면, 어디든지 달려 간다. 진짜 옛날 항아리는 돈만 있다고 살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처음 3~5년 동안에는 1,000여개의 항아리를 사용하였지만, 지금은 약 2,500여개의 옛날 항아리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1930년 이후에 만든 항아리는 쓸 수가 없다. 그중에서 경상도 항아리가 제일 좋고, 그 다음은 전라도 항아리다. 경상도 항아리는 좀 길쭉하고, 전라도 항아리는 좀 둥굴둥굴한게 특징이다.
 항아리를 고집하는 것은 독일이나 프랑스에서 술을 담글 때 나무통을 꼭 쓰는 것과 같은 것이다. 즉 우리 고유의 고추장이나 된장을 담글 때 항아리를 쓰는 것처럼, 매실 장아찌나 원액을 만들 때는 꼭 항아리를 써야 한다.
 항아리는 숨을 쉬면서 안에 들어 있는 것들에 곰팡이가 피게하고, 발효시켜준다. 예를 들어 바싹 바른 항아리를 물에 담가 놓으면, 안으로 물이 스며 들지 않지만, 항아리안에 물을 담아보면 공기 뿜는 것이 보인다. 정말 신기하고 정말 고마운 것이 바로 옛날 항아리다.
 매실로 만드는 모든 식품을 좋은 식품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매실을 잘 키우는 것이 최우선이다. 수확한 매실을 잘 보존하면서 성분과 효능을 더 좋게 만드는 것은 그 다음이다. 
 사흘을 달여서 수분을 없애는 것과 염분과 당분을 이용하는 것도 다 보존하기 위해서다. 염분에 대해서는 실험을 해서 5년간 간수를 뺀 소금을 사용했지만, 당분에 대해서는 새롭게 고민을 많이 했어, 매실 원액을 대량생산하면서 단맛을 내기 위해 어떤 재료를 쓸 건가도 아주 중요한 문제다.

▶효소발효에 좋은 프락토 올리고당을 쓴다.
 1997년에 명인으로 지정받으면서, 식품연구소에도 가보고 매실공부를 다시 시작했지, 사탕수수밭부터 설탕공장까지 여러곳을 들러봤다.
 그래서 다양한 당분으로 실험을 해 보고 나서, 프락토올리고당이란 당분을 알고부터 우리 농원에서는 이 성분을 쓰기로 했다. 프락토올리고당은 효소를 발효하는 과정 등이 더해지기 때문에 값이 비싸다.
 맨 처음 프락토올리고당을 쓸 때 탱크로리 기사가 이 산속 쪼매한 회사가 왜 이런 비싼 걸 뭐 때문에 이렇게 많이 쓰냐고 물었다. 그 기사왈 이것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음료수나 요구르트를 만드는 회사 몇 군데서만 쓰는 것이라고 했다.
 이처럼 비싼 포락토올리고당은 매실의 숨을 죽이지 않으면서 설탕의 나쁜 성분을 막아주는 효과가 있제. 그래서 우리 청매실에서는 포락토올리고당만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올해 매화축제에 100만명이 다녀갔다
. 청매실농원 사업을 시작한 다음해인 1995년 축제를 열어 사람들을 오게하면 홍보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해서 `제1회 청매실농원 매화축제`를 열었어, 매화꽃이 예쁘게 피었을 때 매실주도 꺼내 놓고, 사람을 기다리는데 아무도 안올까봐 조바심도 났제, 그런데 그때 사람들이 1.000명도 더 넘게 온 거야 얼마나 반가웠는지 몰라.
 그다음해에는 사람들이 더 많아 와서, 내가 혼자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찼어, 행사 규모가 너무 커진 거야, 그래서 광양시와 협의 하여, 1997년 새로이 제1회 광양매화축제로 이름을 바꿔 지금에 이르고 있는데, 올해는 약 100여만 명(광양시 추산)이 다녀 갔다.

▶밥상이 약이다
 나는 "밥상이 약"이라고 생각한다. 밥상에서 못고치는 병은 약만가지고는 고칠 수가 없다. 이렇게 우리 몸에 좋는 매실을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개발하고, 또 개발해야 한다.
 우리 청매실농원에서는 연간 약 40여억 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지만, "개성이 없는 농업은 2등이 될 수 밖에 없다." 나는 아직도 경영자가 아닌 농사꾼 마음으로 살고 있다. 
 그런데, 큰 문제가 하나 있어, 그게 뭐냐면, 이제는 매실이 너무 많아, 제주도에서부터 강원도에 이르기까지 전 국토가 온통 매실나무로 뒤덮혀 있어, 정말로 자칫하다가는 매실농가 모두가 다 죽는 꼴이 될 수도 있어, 정신 똑 바로 차려야 한다.   
 미래지향적인 생각으로, 미래지향적인 제품을 만들어 내야 할 것이다. 아니면, 바로 도퇴되는 상황을 맞이 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정성이 담긴 제품이고, 다른 곳에서 구할 수 없는 품질과 가치가 있다면,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우리 제품을 찾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 때문에, 미래를 위한 제품을 만들기 위해 내가 아직도 농사꾼의 마음으로 일을 하고 있는 거야. 더욱이 이런 제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친환경농법을 써야한다. 
 우리가 현대를 살고, 또 미래를 살게 되어도 농사는 옛날식으로, 자연농업으로 해야 한다고 말해주고 싶다. 친환경농법은 어렵고 유별난 것이 아니고, 당연한 것이다. 땅이 살고 풀이 살고, 사람도 같이 살아나게 하는 바로 친환경농법인 것이다.  
 뭐니 뭐니 해도 우리 몸에 좋은 매실을 잘 키우고 좋은 제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이유를 불문하고 친환경농법을 써야한다고 강조하고 싶다고 말했다.
 
▶광양시 매실농가 지원에 최선
 한편, 전남 광양시에서는 농업기술센터 내 매실특작과를 두고, 4,200여 매실농가의 타 시군과 차별화를 위해 매실에 대한 품종별 특성을 분석하고, 개화에서 정지전정까지 전과정에 대해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또 매실농가에 년간 약 4억 여원의 예산을 지원하고 있는 광양시는 수확기와 명절 등에 직거래 장터를 운영하는 등 매실과 관련한 다양한 자료 확보를 통해 국내 매실주산지 위상을 제고 하기 위해 광양매화공원도 조성할 예정이다.      

김종열 기자  ysnews090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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