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유적 1호는 평양성으로 고구려시대는 장안성이라 불린 곳 
38선이 송악산을 지나면서 이남은 남한정부, 이북은 북한정부의 땅 
북한 국보1호 대동문의 현재 모습

조선후기 평양 구시가, 대동강이 보이고 오른쪽에 대동문과 왼쪽의 연광정
평양 이문리에 있는 조선 중기의 성문. 평양성 내성의 동문. 조선 중기에 새로 건립된 지금의 성문.
1994년 평양시 강동군 대박산 기슭에 북한이 새로 지어 단장한 단군릉.

 북한은 고조선과 고구려의 수도였다. 고려시대 서경인 평양은 조선 사대부들이 가장 원했던 관직이 평양감사였다. 지금까지 내려오는 속설로 `평양감사도 저 하기 싫으면 그만`이라는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저 하기 싫으면 그만이라는 것처럼 평양은 물자가 풍부하고 풍광이 아름다운 곳이었다. 
 송악산은 일제해방과 남북분단을 겪으면서 급조된 38선이 그어졌다. 송악산 이남은 남한정부, 이북은 북한정부의 땅인 산 자체가 38선이 된 1950년 6월 한국전쟁 이전에도 이 지역을 중심으로 국지전이 일어났다. 1949년 5월 3일과 4일에 걸쳐 벌어진 송악산전투는 남북이 모든 상대방의 월경으로 인해 개전했다고 주장하는 국지전으로 남북 모두가 피해를 입었다. 성균관 일부가 파손되고 개성 선죽동에서는 백여명 이상의 민간인 사망자가 났다고 한다. 남한은 이 전투를 `육탄 10용사`사건으로 한국전쟁 이전 자행된 국지전이었다.
 북한의 평양에는 [평양 8경]이라 불려온 아름다운 경치와 [평양 형승]이라는 경승지가 있다. 평양 형승은 지세와 경치가 빼어나 옛 선조들이 즐겼다는 곳으로 일만 가지 경치가 한눈에 바라보인다는 만경대와 을밀대, 능라도, 청류벽, 추남터 등 모두 9곳의 명소를 말한다. 북한 국보유적 1호는 평양성으로 고구려시대 장안성이라 불리던 곳이다. 평양성은 552년부터 586년까지 36년에 걸쳐 건설되어 668년까지 고구려의 도성이었다. 평양성 성벽은 총 23㎞나 되는 큰 성으로, 고려와 조선시대에도 도시를 방어하는 성으로 평양 8경으로 꼽히고 현재 남아있는 평양성의 대동문, 보통문, 을밀대, 칠성문 등은 조선시대에 새로 지은 것이다. 
 고려 공민왕 때 이승휴의 [제왕운기]에서 단군의 사당이 황해도 문화현 구월산에 있다고 했다. 지금 황해도의 삼성사와 평양의 숭령전에서 단군을 모시던 단군사당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단군제사와 관련한 삼성사 기록은 세종 10년(1428) 우의정으로 퇴직한 유관의 상소에서 나타난다. 
 -"황해도 문화현은 신의 본향입니다. 벼슬을 그만두고 본향에 내려온 지가 여러 해 되었는데 여러 어른들의 말로 이 고을 사적이 오래된 것을 알았습니다. 구월산은 이 현의 주산입니다. 단군조선 때는 아사달산이라고 하였고, 신라 때는 궐산이라 불렀습니다. 그때 문화현을 궐구현이라 명명하였으며, 전조(고려)에 이르러서는 유주감무로, 고종 때는 문화현령으로 승격하여 산 이름의 `궐`자를 느린 소리로 발음하여 구월산이라고 하였다합니다. 이 산 동쪽 재는 높고 길어서 1식 정도 가야 안악군에 이르고, 재의 중허리에 있는 신당은 어느 시대 세웠는지 알지 못합니다. 북쪽 벽에는 단웅천왕, 동쪽 벽에는 단인천왕, 서쪽 벽에는 단군천왕을 이곳 사람들은 삼성당이라고 하고 산 아래 동리를 성당리라 합니다. 신당 안팎에는 날짐승들이 깃들지 않고, 고라니와 사슴도 들어오지 않습니다. 날씨가 가물 때는 빌면 비를 얻는다고 합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단군이 아사달산 신선이 됐으니, 아마도 단군 도읍지가 이 산 아래에 있었을 것이라 합니다. 살펴보건대, 문화현의 동쪽에 장장이란 곳은 전하는 말에 단군의 도읍터라고 합니다. 지금은 증험이 될 만한 것은 다만 동서 난산이 있을 뿐인데, 어떤 이는 `단군이 왕검성에 도읍하였으니, 지금 기자묘가 있는 곳이 바로 그곳이라 합니다. 신이 본 바로 단군은 요(堯) 임금과 같은 때에 임금이니, 그 때부터 기자에 이르기까지는 천여 년이 넘습니다. 어찌 아래로 내려와 기자묘와 맞아 떨어져야 한단 말입니까. 어떤 이는 단군은 단목 아래서 태어났다 하니, 지금의 삼성은 믿을 수 없다합니다. 그러나 신이 보건대, 태고의 처음에 혼돈에서 먼저 하늘이 생기고 뒤에 땅이 생겼으며, 이미 천지가 있게 된 뒤에는 기(氣)가 화(化)하여 사람이 생겼습니다. 그 뒤로 사람이 생겨나서 모두 형상을 서로 잇게 됐으니, 어찌 (사람이 생긴 지) 수십만 년 뒤의 요임금 때 다시 기가 화하여 사람이 생겨난 이치가 있겠습니까. 그 나무 곁에서 생겼다는 설은 진실로 황당무계한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성감으로 헤아려 결정하시고, 유사에 명하시여 도읍한 곳을 찾아 그 의혹을 없애게 하소서."-[세종실록] 10년 무신(1428), 6월 을미(14일).
 유관은 고려 말 조선 초 문신으로 태조 이성계를 도와 조선개국원종공신이 되어 대사헌을 지냈고, 세종조에는 춘추관지사로 [태종실록]편찬과 [고려사]를 개찬한 사람이다. 황해도 문화현 출신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 문화현에서 단군과 삼성사의 존재에 대한 것을 상소한 것이다. 
 삼성당이라 불린 삼성사는 구월산의 동쪽 중턱이라 하고, 이 산을 신라 시대에 궐산(闕山)이란 말을 느리게 발음해 구월산이라 부르게 됐다고 한다. 이것은 단군조선의 실재를 말한 것이다. 그리고 1993년 평양 강동현에 있는 대박산에서 단군릉을  발굴했다. 왕과 왕후로 보이는 유골이 발견됐고 북한은 단군릉을 개건하여 성역화 하였다. 이보다 앞서 1926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모금운동을 하여 평양 강동현 단군릉을 보수하여 해마다 제사를 지냈다하는데, 삼성당은 아직도 그 자취를 볼 수 있다고 한다. 
 황해도관찰사 이예(李芮)는 -"신이 문화현의 옛 노인 전 사직 최지, 전 전직 최득강을 방문하고, 삼성당의 사적을 얻어 기록하여 아룁니다. 단군과 아버지 환웅, 할아버지 환인을 일컬어 삼성이라 하고, 사우를 세워 제사지내다가 이를 폐한 뒤로 당우가 기울어져 무너졌는데, 경태 경오년(1450:세종32년)에 이르러 현령 신효원이 중창하고, 무인년(1458:세조4년)에 현령 매좌가 단청을 하였습니다. 삼성당에 환인 천왕은 남향하고, 환웅천왕은 서향하고, 단군천왕은 동향하여 모두 위패가 있습니다. 속설에 전하기를, 옛날에는 모두 목상이었으나 태종조에 하륜이 목상을 혁파할 것을 건의하여, 삼성의 목상을 부수었다 하며, 의물의 설치 여부는 알 수 없습니다. 삼성당의 서쪽 협실에는 구월산대왕이 가운데 있고, 왼쪽에 토지정신이, 오른쪽에 사직 사자가 있는데, 그 위판은 모두 남쪽을 향해 있습니다. 예전에는 전사청이 없었는데, 매좌가 삼성당 아래에 초가를 지어 승려가 거주하게 하고, 제사 때는 여기에서 재숙하며 제물을 장만하였습니다. 삼성당 서북쪽 3리쯤에 두 절이 있고, 5리쯤에 한 절이 있고, 동북쪽 4리쯤에 한 절이 있습니다. 패엽사도 삼성당 서쪽 6리쯤에 한 고개와 한 시내를 사이에 두고 있습니다. 삼성당 제기는 옛적에는 금과 은을 사용하였는데, 왜란 이후에는 사기를 쓰다가 매좌가 비로소 유기를 만들었습니다. 묘우를 평양으로 이전한 뒤 제사를 폐지한 것이 벌써 60여 년이 되었다 하고, 혹은 태종조 경진ㆍ신사ㆍ임오(1400-1402) 사이라하니....중략, 청컨대 백성의 원하는 바에 따라 평양의 단군묘의 예(例)에 의하여 춘추로 향과 축문을 내려 제사를 행하소서."하니 이를 따랐다. -[성종실록] 3년 임진(1472) 2월 6일(계유)
 성상께서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셨다. 좌의정 송인명이 "삼성사를 훼철하지 말 것을 청하는 유생의 말도 근거한 바가 있습니다. 하필 억지로 어길 것이 있겠습니까? 그대로 두시고 그 밖의 사원에 대해서는 마땅히 엄중하게 신칙을 가하고 인순하여 훼철하지 않는데 이르지 말아야 합니다."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비로소 도신과 수령가운데 금하지 않은 자를 파직시킬 것을 명하였다가 대신이 극력 청함으로 그 명을 정지하였다. -[영조실록] 17년 신유(1741) 9월 2일(갑자)
 하교하시기를,"마침 고사를 열람하다가 구월산성 삼성사를 중수할 때 선조께서 내리신 전교를 봉람하니, 그때의 예당이 봉심한 뒤 설치의 여부에 대해 본도의 도신으로 하여 본현에 문의하여 상세히 장문하게 하였다. 평양 숭령전에 이미 관원을 보내 치제하려 했으나 아직 하지 못하고 있었다. 선조 때 삼성사의 일로 인하여 도신으로 하여금 치체케 한 전교가 있었으니, 이 또한 추술하는 한 가지 일이 된다. 향축을 내려 날짜를 가려 치제한 뒤 장문하게 하라." 하셨다. [정조실록]5년 신축(1781) 11월 28일(병인)
 세종은 1429년(세종11), 평양의 기자묘 남쪽에 단군사당을 짓고, 세조는 1460년 10월 4일 파주와 개성을 거쳐 15일 평양에 도착했다. 17일 단군사당에서 친히 제사를 거행했다. 신주를 `조선시조단군`이라고 썼다.
 이렇게 단군 사당은 조선조 말년까지 존재했다. 1909년, 을사오적의 암살을 꾀했다는 죄목으로 유배생활을 하다 고종 황제의 특별사면으로 풀려난 독립운동가 나철은 오기호, 강우, 유근, 정훈모, 이기, 김인식, 박호암, 김춘식 등과 함께 서울 재동에서 `단군대황조신위`를 모시고, 그 해를 개천(開天) 4366년 기유년(己酉年)으로 선포했다. 그러나 이 삼성사는 일제에 의해 헐려버렸다.
 국조 단군은 더 이상 신화가 아니다. 단군신화는 일본이 한민족을 영원히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국조 단군을 부정하도록 신화로 만들었다. 이것이 식민사관의 핵심이다. 이제 단군을 중심으로 남북한이 한민족의 정체성과 동질성을 회복할 때다. 공산주의도 북한도 모시는 한민족조상 환인환웅단군 72분을 모신 삼성사를 조성하고 단군릉도 새로 단장하였다. 외세에 의해 말살된 우리 민족의 뿌리역사는 조선조까지 존재하였다. 
 고려시대까지 우리 민족은 선진국이었다. 한민족 역사에서 이조와 일제, 그리고 화교왕족의 중화정책과 일제 식민지정책의 해악은 결코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다. 이것들로 인한 세월은 식민노예의 굴레에서 우리 민족은 자존을 잃고 살았을 뿐만 아니라 이제라도 분명히 알아야 할 일이다. 이조 500년과 일제 36년은 모두 외국인들의 강제통치시대였다. 지금 우리나라 국사교과서에는 아직도 그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중국도 자기들 위주로 써놓은 역사를 바로잡아야 한다. 
 이것을 온전히 바로잡지 않는다면, 이조이후 600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똑같이 흘러갈지도 모른다. 북한은 중공의 동북공정에서 어쩌면 조선족 자치주로 소멸될지도 모른다. 현재 분단 상태이긴 하지만 한민족 역사만큼이라도 남북이 하나로 단합하여 고대 역사통일 이루어 나간다면 평화통일은 한결 쉬워질 것이다.


박정애(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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