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연폭포, 서경덕, 황진이가 그들이다
황진이의 넋을 위로한 조선 최고의 풍류객 백호 임제

사진: 황진이가 반했다는 박연폭포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내여
춘풍 니불 아래 서리서리 너헛다가
어론님 오신 날 밤이여든 구뷔구뷔 펴리라
                           -황진이(黃眞伊)

청산(靑山)은 내 뜻이요 녹수(綠水)는 님의 정이
녹수 흘러간들 청산이야 변할 손가
녹수도 청산을 못 잊어 울어예어 가는고
                        -황진이(黃眞伊)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 
일도창해하면 돌아오기 어려우니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황진이(黃眞伊)

어져 내 일이야 그릴 줄을 모르던가 
이시랴 하더면 가랴마는 제 구태어 
보내고 그리는 정은 나도 몰라 하노라. 
                       -황진이(黃眞伊)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는다 
홍안(紅顔)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나니 
잔(盞)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허하노라. 
                        -백호 임제

 삼절(三絶)은 3가지 뛰어난 재주를 가진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동진의 고개지는 재절ㆍ화절ㆍ치절의 삼절이었고, 당나라 송령문은 서ㆍ화ㆍ용력의 삼절이며 정건은 시ㆍ화ㆍ헌(獻)의 삼절로 통했다. 대개 삼절은 문인화가로 시ㆍ서(書)ㆍ화(畵) 3가지를 겸비한 경우이다. 시서화일률사상의 문인화론이 성립되면서 시서화 삼절은 더 높이 숭상되었다. 
 조선 중기의 선비화가인 어몽룡의 묵매, 이정의 묵죽, 황집중의 묵포도를 삼절이라 했고, 우리나라는 신잠, 김제, 이정, 이인상, 강세황, 신위, 김정희 등과 같은 선비화가들을 시서화 삼절로 불리어졌다. 그리고 조선 중기의 선비화가인 어몽룡의 묵매, 이정의 묵죽, 황집중의 묵포도를 삼절이라 했다. 여기에는 사물도 포함되었다. 송도의 명기 황진이와 유학자 화담(서경덕), 송도(개성)의 유명한 명승지 박연폭포를 가리켜 송도삼절이라 했다. 
 조선 중종 때 개성에서 태어난 황진이(黃眞伊)는 기명(妓名)은 명월(明月). 기록에 의하면 그녀는 양반 아버지와 기생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유난히 용모가 곱고 자태가 아름다워 많은 사람들이 어여삐 보았다. 그런데 황진이를 혼자서 마음에 담아 연정을 키우던 마을 청년이 끝내 병이 들어 죽게 되었다. 청년의 상여가 마침 황진이의 집 앞을 지나가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갑자기 상여꾼들이 움직이지를 않았다. 관이 천근만근의 무게로 내리눌려 발이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로써 대문 앞이 소란해지자 황진이가 자신의 저고리를 관위에 얹어주자 비로소 움직였다. 
 그 일은 장안 사람들의 화제꺼리가 되었다. 이 때 황진이는 자신의 미모로 인해 한 남자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자책감에 시달렸다. 앞으로도 그런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생각에 차라리 만사람 앞에 나서는 기생이 되기로 했다. 그녀가 기생이 된 후 시가와 풍류로 일생을 풍미할 때 많은 선비와 유학자들의 관심 속에 이목을 끌었다. 사대부와 명사 선비들이 과거에는 급제를 못해도 황진이 한번 만나보는 게 소원이었다. 그렇게 세상 풍류남아와 영웅호걸들을 굴복시키면서도 화담 서경덕만은 어쩔 수 없었다. 애먼 30년 수도한 지족 선사를 파계시키고 말았다. 
 서경덕(徐敬德) 호 화담(1409-1546) 황해도 개성 화정리(和井里)에서 출생으로 조선 중기의 유학자 도학자 주기론의 선구자였다. 윤리도덕을 가르치며 만은 사람의 존경을 받는 선비로 원리설 이기설 태허설 귀신 사생설 등 기를 중시하며 주기철학을 정리하여 많은 학자를 양성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독학으로 이(理)와 기(氣)의 성리학자로서 과거에도 급제 하고도 부패한 조정에 염증을 느껴 벼슬을 하지 않고 오직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절새 미인이면서 성악, 한시, 특히 시조에 뛰어났던 황진이의 시조로 지금까지 전해지는 것은 모두 6수로 대부분 사랑과 이별을 다루고 있다. 문학의 성취보다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썼다. 사대부들의 시조와는 달리 그녀의 시조는 여성 특유의 섬세한 정서를 진솔한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시적 언어로 잘 형상화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생의 애착과 쾌락의 시간을 소중히 여긴 의식은 당대 규범의 틀에 갇혀 자신의 감정을 절제한 사대부들의 것과는 달리 자유롭고 거침없는 감정의 발로였다.
 황진이는 우리나라 최초로 계약결혼을 했는데 양반 이사종과 3년 살기로 계약 결혼을 한 후에 다시 3년을 더 살았다. 천하의 절색인 명기라도 30일 이상을 같이 지내지 않는 예조판서 소세양이였다. 황진이는 헤어진 소세양을 그리워하며 시를 지어 보내기까지 했다.
 가장 유명한 일화는 벽계수와의 이야기이다. 그녀의 시 `청산리 벽계수야`는 왕가의 종실 `벽계수`를 희롱하기 위한 시다. 벽계수는 황진이를 만나고 싶었으나 사람들이 보기만 해도 그녀에게 반하니 그녀를 골려줄 양으로 친구인 이달과 의논을 하였다. 이달은 벽계수에게 황진이의 집근처 누각에 올라가 거문고를 한 곡조 타면 황진이가 올 것이니 모르는 척하고 말을 타고 가면서 다리를 지날 때 까지 돌아보지 말라고 일러주었다. 벽계수는 친구의 말대로 거문고를 한 곡조 타고 말을 탄 채로 다리를 향하고 있었다. 이때 황진이가 벽계수 등뒤에 대고 문제의 시를 읊었다. 저 만은 그러지 않을 거라고 왕가의 귀족답게 단호히 뿌리치리라 했건만 황진이의 시낭송을 듣고는 말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이때 황진이는 명사가 아니라 풍류랑이라 조롱하면서 돌아서 버렸다한다. 
 미인이라 단명했는지, 천재라서 단명했는지 아무튼 38살 젊은 나이로 죽으며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천하의 남자를 사랑하기 위해 스스로 자애할 수 없었고,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제가 죽거든 금수도 관도 쓰지 말고 옛 동문 밖에 시신을 내버려 개미와 땅강아지, 여우와 살쾡이가 내 살을 뜯어먹게 하여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경계 삼도록 해달라고 했다.
 조선시대 최고 풍류시인 백호(白湖)임제(林悌1549-1587)는 벼슬길을 멀리하며 방랑을 했다. 세상에 널리 알려진 천하의 황진이와 시문을 주고받으며 자웅을 겨루려 하였다. 그러다 마침 평안도사(정 6품)로 벼슬을 받고 임지로 부임하던 길에 송도에 들러 황진이를 찾았으나 석 달 전에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그는  관복을 입은 채로 술잔을 올리고 읊은 추도시가 `청초 우거진 골에`였다.  
 조선의 대문장가가 조선 최고의 기녀무덤 앞에 넋을 달래며 제문을 짓고 제를 지냈던 것이다. 황진이가 살았을 때 조우를 바랐던 뜻을 아쉬워하며 그 기와 예를 안타까워한 것인데 이 것이 훗날 조정에서 말썽이 되어 벼슬을 파직 당했다. 그 아니어도 낡은 관습을 싫어했던 그는 당파로 시끄러운 조정의 현실을 개탄하며 전국 명산대천을 유람하며 기생, 승려, 묵객들과 교우하던 참이었다. 
 조선시대 최고의 명기 황진이와 함께 조선시대 최고의 한량풍류객이었던 백호 임제는 그렇게 만났던 것이다. 양반사대부의 허울을 벗어 던졌던 파격적이고 자유분방한 행적과 호방한 기품을 보였던 명사, 백호 임제도 황진이 처럼 39살에 세상을 떠났다. 
 황진이 무덤 앞에서 읊은 시조를 비롯한 기생 한우와 주고받은 형식의 한우가 등 천여수의 시와 남명소승, 수성지, 화사, 원생몽유록, 임백호집 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사방 여러 나라 중에 황제를 지칭하지 않는 나라가 없는데 유독 우리나라만 그러지 못하니, 이런 못나고 욕된 나라에서 태어나 죽었다고 무엇이 아깝고 서럽겠느냐. 내 죽음에 곡을 하지 마라.`는 유언을 남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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