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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임금을 섬기지 않았던 불사이군의 고려충신들 정신
사진: 포은 정몽주 영정

수양산 백이, 숙제 불사이군의 절개와 지조의 상징 선죽교
이방원의 하여가와 정몽주의 단심가 
조선의 개국과정에서 반대파의 주장을 대변했으나, 
개국 후에는 신하의 충성심을 나타내는 것으로 널리 알려졌다. 

 

사진: 선죽교, 개성시 선죽동 자남산 동쪽 기슭의 작은 개울에 있다.
사진: 원래 이름은 선지교(善地橋), 한석봉(韓石峯) 글씨의 비(碑)가 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어져 백년까지 누리리라
<하여가 何如歌〉

단심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이시랴
<단심가丹心歌>

송도라 옛 터전에 달빛도 차가운데
말 없는 바람결에 소나무 우저기네
아느냐 충성의 피 흐른 곳 어드메냐
목 메여 묻는 말에 돌장이 들먹이네
바람이 잠잔다고 달마저 흐렸느냐
선죽교 피 다리엔 벌레만 우는 구나
몸이야 가셨지만 혼마저 가셨으니
정포은 이름 석 자 잊지야 않으리라
가수 조영남 노래 [선죽교]

 

  이방원은 아버지 이성계의 조선 건국을 앞두고 시조 하여가(何如歌)를 통해 조선 건국에 대한 정몽주의 의중을 은근히 떠본 것인데, 정몽주는 고려에 대한 충정을 담은 `단심가(丹心歌)`를 지어 고려에 대한 자신의 충심이 죽음 앞에서도 변하지 않을 것임을 밝힌다. 포은 정몽주의 단심가는 조선 제3대 태종이 된 태조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의 하여가에 답해 지은 것으로 고려 신하의 충절을 드러낸 노래이다. 이방원이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세우는 일에 가담할 뜻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하여가 시를 지어 정몽주의 마음을 떠본 것이다. 그러자 위의 단심가를 지어 답한 것으로 절박한 상황에서도 사려 깊은 선비의 면모를 보여준 이 노래는 문학적 상상력이 아니면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이 시가는 조선의 개국과정에서 반대파의 주장을 대변하였으나, 개국 후에는 신하의 충성심을 나타내는 것으로 널리 알려졌다. 이방원은 고려 공양왕 4년인 1392년 개성 선지교(善地橋)에서 정몽주를 살해한다. 정몽주가 이성계를 문병하고 돌아오는 도중에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인 이방원이 보낸 조영규 등 자객들의 철퇴에 맞아 피살되었다.
1392년(고려 공양왕 4년) 4월 4일 저녁 정몽주는 이성계를 만나 정황을 살피고 귀가하던 중, 개성 선죽교에서 이방원의 문객 조영규와 그 일파에게 암살당했다. 그가 이성계 집을 방문한 것은 이방원이 계략을 써 그를 초청했다고도 한다. 이미 이방원은 심복부하 조영규를 시켜 철퇴를 꺼내어 선죽교 다리 밑에 숨어 있었다. 정몽주가 지나갈 때를 기다려 죽이라는 지시를 받고 있었다. 
이때 정몽주는 제자 변중량을 통해 이를 알고 있었다고 한다. 조영규와 무사들이 나타나자 그는 분위기가 이상함을 감지하여 말을 타고 이성계의 집을 떠났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말머리를 돌려 친구 집에 들려 술을 마셨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는 부러 말을 거꾸로 타고 있었고, 녹사에게는 말머리를 잡고 앞에서 끌라했다. 이에 녹사가 포은 선생이 술이 취해 그러는 것이 아닌가 하여 왜 그러시냐고 물었다. 그러자 정몽주는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몸이라 맑은 정신으로 죽을 수 없어 술을 마셨고, 흉한이 앞에서 흉기로 때리는 것이 끔직하여 말을 돌려 탄 것이라 했다.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 녹사는 말을 끌고 선지교를 향했다. 다리를 넘으려 할 때 궁사가 말을 저격하여 넘어트렸고, 순간 괴한이 나타나 낙마한 정몽주와 그를 감싸 안고 울부짖으며 보호하던 녹사 김경조를 철퇴와 몽둥이로 내리쳐 죽였다. 
이때 그가 흘린 피가 개성 선죽교의 교각에 묻었는데, 이후 선죽교 돌 틈에서는 대나무가 솟아나 그의 충절을 나타낸 것이라 믿었다. 정몽주가 흘린 핏자국에서 대나무가 솟아났다하여 대 죽(竹)자를 넣어 선죽교(善竹橋)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 다리의 원래 이름은 선지교 이였고, 후일 그 자리에서 나타난 대나무 때문에 선죽교가 된 셈이다. 아직도 정몽주의 혈흔이 남아 있다 하는데, 1971년 북한의 문화재로 지정된 선죽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개성시에 있다. 
돌다리 위에는 붉은 반점이 정몽주의 혈흔이라 전하는데, 옆에 있는 비각에는 그의 사적을 새긴 비석 2기가 그 안에 있다고 한다. 이 핏자국은 독립운동가 김구 선생이 1947년 그곳을 방문했을 때까지도 선명했다고 백범일지에 기록했다. 선죽교는 1780년(정조 4) 정몽주의 후손이 주위에 돌난간을 설치하고 별교를 세워 보호했다. 다리 동쪽에는 선죽교라는 3자가 새겨진 비가 있고, 다리 서쪽에는 비각 안에 1740년(영조 16) 어제어필의 포충비와 1872년(고종 9) 어제어필의 표충비가 있다. 부근에는 1641년(인조 19)에 부임한 유수 목서흠이 건립한 읍비가 비각 안에 있는데 여기에는 일대충의만고강상(一大忠義萬古綱常)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정몽주의 본관은 영일(迎日). 초명은 몽란, 몽룡. 자는 달가, 호는 포은(圃隱). 인종 때 지주사를 지낸 습명(襲明)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성균관 운관(云瓘)이다.
당시 이색으로부터 우리나라 성리학의 시조로 평가받았다. 얼마 후 왜구가 자주 내침해 피해가 심해지고 화친을 도모하기 위해 보내진 나흥유가 투옥됐다 돌아오자, 보빙사로 일본에 보내져 국교의 이해관계를 잘 설명해 일을 무사히 마치고 고려인 포로 수백 명을 구해 돌아왔다. 그러나 고려왕조를 부정하고 새로운 왕조를 개척하는 데에 반대해 뜻을 같이하던 이성계를 찾아가 정세를 엿보고 돌아오던 중 이방원의 문객 조영규 등의 습격을 받아 사망한 것이다.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白鷺)야 가지 마라. 
성낸 까마귀 흰빛을 새오나니 
창파(滄波)에 좋이 씻은 몸을 더럽힐까 하노라. 
정몽주가 이성계를 병문을 가던 이 날에는 80이 가까운 노모는 간밤의 꿈이 흉하다면서 문밖까지 따라 나오며 이 노래를 불러 아들의 가는 것을 말렸다고 한다. 
조선 제 3대 왕인 태종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로 조선 개국에 주동적 역할을 한 이방원은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두 차례나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이복동생과 개국 공신들을 주살 했으나, 즉위 후 정치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이미 타락한 고려 왕조를 그만 포기하고, 자신과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과 칡덩굴처럼 얽히어져 함께 조선왕조를 세우자는 뜻으로 이방원이 `하여가`를 읊고 나자, 정몽주는 자신도 시조를 하나 지어보겠다 청한다. 이방원은 흔쾌히 승낙했다. 정몽주는 `단심가`를 시조를 읊었다.
은나라가 망하자 새 왕조인 주나라의 곡식 먹기를 거부하고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으며 절의를 지켰다는 중국의 백이와 숙제를 떠올리게 하는 두문동 72현의 고려 말 충신들에는 삼은(三隱)이 있었다. 목은, 이색(李穡), 포은, 정몽주(鄭夢周), 야은, 길재(吉再)를 이르는 말이다.
오백 년(五百年) 도읍지(都邑地)를 필마(匹馬)로 도라드니 
산천(山川)은 의구(依舊)하되 인걸(人傑)은 간 듸 없다. 
어즈버 태평연월(太平烟月)이 꿈이런가 하노라.
고려의 옛 도읍지에 들러 인간 세상의 무상을 탄식한 회고의 시조로, 나라는 망하고 사람은 사라졌지만, 산천은 옛 그대로 변함이 없다는 고려의 마지막 충신으로서 망국의 한을 노래한 <회고가>는 고려의 삼은이라 불리는 길재의 시조이다.
백설(白雪)이 잦아진 골에 구름이 머흐레라. 
반가운 매화(梅花)는 어느 곳에 피었는고 
석양(夕陽)에 홀로 서 있어 갈 곳 몰라 하노라. 
목은, 이색의 시조로 당시 고려 멸망의 서러움과 허무함을 절절하게 표현한 시가 들이다. 개국공신인양 의를 저버리는 순간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등 소수의 인사들만이 저항하다가 처형을 당하거나 낙향하여 칩거하였다. 
관료들에게 왕조의 교체는 충격 그 자체이다. 권력을 맛본 이들의 새 왕조의 건국 에 명분은 갈리었다.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여 더 부강한 나라를 만들자는 개국파나 불사이군을 부르짖으며 지조를 지킨 지조파 모두 자신의 뜻을 세워서 백성을 위하거나 명분을 지켰다. 그러나 자신만의 권세와 부를 위해, 출세를 목적으로 강하고 힘 있는 세력에 편승하는, 물질 만능에 정신이 피폐해져가는 이 시대. 고유한 우리 민족의 선비정신은 한 번쯤 돌아봐야 할 무형의 자산이자 만고의 정신적 유산으로 그들의 정의와 신념과 충절은 교훈이 되어야 할 것이다.

박정애(시인)

 

박정애 시인  ysnews090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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