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가 조선왕조의 태조에 등극했던 개경 수창궁은 
고려의 정궁인 만월대의 별궁 중 한 곳.
서울에서 50km거리에 위치한 개성은 고려의 도읍지
936년 후삼국 통일 후 선죽교에서 피를 흘리며 망할 때까지
개성은 고적들, 우리나라 중세역사의 중심무대.  
[만월대]는 음력 정월대보름달을 바라보기 위해 만든 
망월대(望月臺)에서 유래된 것

 

황성 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이 잠 못 이뤄
구슬픈 벌레소리에 말없이 눈물져요.

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세상이 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노라
아 가엾다 이내몸은 그 무엇 찾으려
끝없는 꿈의 거리를 헤매어 왔노라.

나는 가리로 다 끝이 없이 이발길 닿는 곳
산을 넘고 물을 건너서 정처가 없이도
아 한없는 이 설움을 가슴속 깊이안고
이 몸은 흘러서 가노니 옛터야 잘 있거라.

                                   -대중가요 황성옛터-

사진: 북한의 개성 송악동(舊 행정구역 만월동 71-8번지) 송악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이곳은 태조 이성계가 태어난 곳으로 알려졌다. 북한의 국보 122호, 유네스코 세계유산 개성역사유적지구로도 등재됐다.
사진: 대중가요 [황성옛터]의 배경무대로 알려진 만월대 발굴현장 모습
사진: 고려의 정궁 연경궁과 만월대를 복원한. 가상 조감도.

 삼절까지 이어지는 이 노래는 1928년 일제 강점기 한국에서 1928년 발표된 대중가요다. 애상적인 이 노래는 한국인이 첫 번째로 작사와 작곡을 한 대중가요로도 유명하다. 작사는 왕평이란 사람이 했고, 작곡은 전수린, 노래는 이애리수가 했다. 1928년 막간 무대에서 불러 발표한 곡으로 1932년에 레코드로 제작되어 세상에 나왔다. 그 시대에 5만장이 팔렸다. 이 곡은 전수린이 개성에서 공연하고 있을 때, 막간에 바이올린 반주를 연주하는 걸 보고 왕평이 노랫말을 붙였다. 
 황성옛터(원제목: 황성의 적)란 노래는 1930년대 당시 무너진 왕조의 상처받은 식민지 백성들 슬픔을 어루만져 위로해주던 노래였다. 이 노래 작사자는 1908년 경북 영천에서 태어난 왕평(본명 이응호)이었고, 작곡가는 개성 출생이였다. 이 노래를 불렀던 가수 역시 개성 출신인 이애리수(본명 이음전)였다. 왕평은 태어나면서 부터 어머니 잃고 동냥젖으로 자랐다. 서울의 친척집에서 배재중학, 조선배우학교를 거쳐 악극단 `연극사`(演劇舍)의 단장이 되어 악극단을 이끌고 전국을 떠돌다 개성에서  멸망한 고려의 왕궁 터인 [만월대]를 다녀온 날 이 노래를 만들었다고 한다. 
 왕평은 1940년 평북 강계 공연에서 무대에서 쓰러져 작고했는데 그때 왕평은 33세의 노총각이었다. 부친이 살고 있던 경북 청송군 파천면 송강리 수정사란 사찰 맞은편 북쪽 산기슭에 묻혔다. 이날 많은 동료연예인들이 왕평의 마지막 길을 눈물로 지켜보았는데 가수 남인수는 `오호라, 왕평`이란 장송곡을 취입하기도 했다. 그런데 일제경찰이 왕평의 무덤 매장허가를 내주지 않아 봉분조차 없이 오늘까지 그대로 방치되어 왔다. 낭만가객으로 널리 알려진 영남대 국문과 이동순 교수가 왕평의 유족들을 어렵게 찾아냈고, 팔순이 된 아우의 안내로 왕평 묘소에 묘비를 세웠다는 말을 최근 지리산 청학동에서 들었다. 이동순 교수가 왕평의 묘소를 다녀온 후 어느 모임에 나가 상황을 얘기했더니 모두들 비분강개하여 한국의 훌륭한 대중문화인의 무덤이  방치되어 되겠냐며 뜻을 모아 이루어지게 됐다고 했다. 이 모든 과정을 어느 방송사에서 `왕평-조선의 세레나데`란 타이틀로 한 시간 분량의 TV 다큐멘터리 방영을 했다. 
 황성옛터 노랫말의 배경이 된 이 [만월대]는 경술국치가 있기 1년 전인 1909년에 대한제국의 순종 황제가 허허벌판이 된 만월대를 방문하게 되었다. 일제가 기획한 서북 지역 순행에 나서면서 일제의 의도였는지 순종의 의도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들과 함께 [만월대]에 들렸다고 전한다.  
 김영삼 문민정권이 들어서면서 남북한정상회담을 열기로 합의한 바도 있지만 김대중정권 부터였다. 김정일이 생존해 있을 때였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 퍼주기 논란이 일어났지만 개성공단의 조성도 그런 노력의 일환으로 북한의 값싼 노동력을 활용하여 한국기업을 활성화한다는 일석이조의 경제적 효율성을 내세웠다. 개성공단을 조성하기 위해서 정부에서는 토지공사와 현대가 공동으로 사업시행협약을 체결하도록 했고 통일부에서 2002년 1차 조성사업협력자 승인이 떨어졌다. 
 개성공단과 개성 시내관광 등이 활발하게 추진되던 시절인 2007년부터 남북한 학자들이 공동으로 발굴조사를 진행했고, 수해로 큰 피해를 입은 만월대 복구공사가 진행되자 남측의 복구인원도 개성공단에 체재하면서 공사에 참여했다. 
 노무현 정부는 일사불란하게 이를 진행시켰다. 국제적 관례에 따른 분양, 통행, 외화관리, 임차료, 전화, 숙박사업과 배수장도 착공되어 1단계 조성공사를 마치고 공장가동에 들어갔다. 북한의 노동력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제품은 품질을 인정받아 수출전선에 기여할 것으로 전망되었다. 그런데 북한 측에서는 핵과 로켓발사 등에 따른 긴장을 이유로 공단에 체류하는 남측 인사들의 출입통제를 반복하다 필수요원까지 대거 추방했다.
 이후 여러 가지 문제로 관계가 냉각된 후에는 지금까지 소강상태지만 2018 평창 동계올림픽 기간에 평창 주경기장 인근의 상지대관령고등학교에서 남북한 사학자 공동 학술관련 모임인 남북역사학자협의회 주최로 만월대 공동발굴 특별 전시전이 열리기도 했다. 앞으로는 개성의 만월대에서 `황성옛터`노래를 불러볼 날도 멀지 않아 있으리라 생각도 해 본다.
 고려 태조 2년(919년)에 창건된 만월대는 보름달을 바라본다는 전망대로 망월대(望月臺)에서 유래된 만월대란 이름도 조선시대부터 였다. 만월대는 원래 궁궐터를 의미하지만, 현대에서는 궁궐 자체를 칭하는 용어로도 사용된다. 현재 북한의 개성 송악동(舊 행정구역상 만월동 71-8번지) 송악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북한의 국보 122호, 유네스코 세계유산 개성역사유적지구로도 등재됐다. 
 원래 태조 왕건이 태어난 집터로 알려진 이 곳은 고려건국 직후인 태조 2년(서기 919년)에 창건된 것으로 창건된 왕궁은 황성과 궁성으로 이루어졌는데 정궁이나 본궐이라 하지 않았다. 만월대라는 이름은 고려 이후 조선시대부터 불리던 이름으로 음력 정월대보름달을 바라보기 위해 만었던 망월대(望月臺)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만월대를 왕궁 전체로 지칭하면서 궁성 안에서 관료들이 조회를 하던 회경전을 중심으로 한 중심부의 주 건축물들만 고려 왕궁의 대표적인 명칭으로 부르고 있다. 
 태조 대에 건립된 이후 고려 현종 때인 1011년에는 거란의 침입으로 불타 없어지기도 하고, 인종 때 벌어진 이자겸의 난(1126년) 당시에 척준경이 궁에다 불을 질러 왕이 거주하는 곳까지 불에 타 1132년 중건 될 때까지 왕이 궁 밖으로 떠돌았다고도 한다. 이런 수난이 있은 이후에도 1171년 화재로 소실되고 1179년 다시 중건 되고 1225년 다시 화재로 소실되기를 거듭하는 가운데 1231년 몽골의 침입이 시작되고 이듬해 강화도 천도가 단행되면서 만월대 중건이 중단되어 오랜 기간 동안 방치됐다. 1270년 무신정권이 몰락하고 개경 환도가 이루어지면서 중건이 완료되기까지도 황성옛터가 된 만월대는 한 많은 곳이었다.
 1362년 홍건적의 난으로 소실된 후 복구되지 못하고 고려의 패망을 맞이했고, 고려 사직에 막을 내리게 한 현장인 선죽교는 조선 개국을 거부한 채 은거한 고려충신 두문동 72현을 기리는 기념비, 조선이 건국 이후에는 고려의 종묘를 부수고, 고려의 왕족인 개성 왕(王)씨를 탄압하는 등 고려 왕실의 흔적을 지우려고 했던 전적에도  궁만은 남겨두었는데도 결국 수난을 벗어나지 못했다. 
 조선 궁궐의 모습과 다르게 계단식으로 된 것은 풍수지리설에 따라 산을 훼손하지 않고 궁궐들을 배치하면서 언덕을 그대로 두고 경사를 이용해 궁궐을 건축했다. 만월대를 비롯한 고려의 왕궁들은 평지에 세워진 조선의 왕궁과 달리 높이 쌓은 축대가 인상적인 것은 산을 훼손하지 않고 궁궐을 지으라는 풍수지리적 조언에 따라 지형을 그대로 두고 언덕 경사를 그대로 이용해 궁궐을 지었기 때문이다. 이는 강화도 고려 왕궁 터, 삼별초의 항쟁 거점인 진도군 용장산성의 임시 궁궐터와도 같은 방식이다. 고려의 건물은 축대를 쌓아 웅장하게 만들고, 계단식으로 건물을 배치해 위엄 있게 보이려 한 것이다. 
 만월대는 거란, 몽골 침공 때에도 폐허가 되었지만 다시 재건하였으나 고려 공민왕 10년(1361년)에 `홍건적의 난` 때 다시 불탔다. 당시, 만월대는 별궁인 연경궁과 함께 폐허가 되었지만 고려왕조는 재건하지 못하고 별궁 수창궁을 왕궁으로 사용했다. 고려가 무너지고 끝내 복구하지 못 한 채로 옛터만 남아 있었던 것이다.
 조선이 한양을 도읍으로 삼고 천도한 것은 태조 이성계 때지만 조선의 수도가 완전하게 정착된 것은 태종 이방원 때이다. 이성계는 신도안, 계룡산 일대 등 중부지방 여러 곳을 도읍지로 물색하다 결국 한양 북악산 아래에 터를 잡고 경복궁을 건립했다. 여기에 건축 작업을 진두지휘한 인물은 정도전과 권중화 였고 1만 5천명이 부역에 동원됐다고 태조실록 4년 8월 12일자에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고향이 그리웠던 정종(2대 임금)은 어머니 신의왕후 재릉에 참배하러 개성에 갔다가 환궁하지 않고 그대로 머물렀다. 태종(3대)도 처음에는 개경 수창궁에서 국사를 보고 있었는데 수창궁이 화재로 전소되면서 한양으로 천도할 수밖에 없었다. 
 태종 때 여러 대신과 무학대사 사이에는 풍수상 주산이 정해져야 그 아래 궁궐이 위치하기 때문에 당시 논쟁은 무척 중요했다. 정도전과 권중화는 북악 주산론, 무악대사는 인왕산 주산론, 하륜은 무악산 주산론을 각각 주장했다. 북악산은 지금의 청와대 뒷산으로 당시 백악산이라 불렀다. 그런데 좀처럼 의견이 모아지지 않아 태종 이방원은 척전(엽전던지기)으로 한양의 주산을 정하자고 했다.
 이때 동전을 세 번 던져 얻은 괘는 신도는 2길(吉) 1흉(凶), 송경과 무악은 모두 2흉(凶) 1길(吉)이었다. 여기서 신도란 지금의 북악산을 말한다. 

저작권자 © 양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