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대(三代)에 걸친 25년간 여섯 번의 재판에서
1승 5패로 끝나버린 허무한 패소
재판의 승패는 예금의 시효였다

사진: 보성학교(普成學校: 고려대학교의 전신)
사진: 구한말의 제일은행
사진: 이종호(1885-1932).독립운동가, 교육자. 함경북도 명천출생. 대한제국 내장원경을 지낸 보부상출신 백만장자 이용익의 손자로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이종호는 보성학교 설립자인 할아버지가 사망하고, 그의 뒤를 이어 보성학교를 맡게된다. 러시아에서 사망한 거부였던 조부 이용익의 국내의 막대한 재산을 고스란히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1905년 그의 나이 20세였다. 할아버지의 막대한 재산을 은밀히 독립운동 지원자금으로 사용했고, 이 자금들은 독립운동의 초기 자금이 되었다. 안창호의 신민회 서북학회 등 전국의 20여개 학교를 설립하는 자금으로 이용되었다. 
 국권상실 후 보성학교 운영을 천도교 2대 교주였던 의암 손병희에게 인계하고 1907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했다. 권업회를 조직하고 [권업신문]을 발행하면서 4개의 학교를 설립하였다. 이종호는 연해주 등 할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라 남아있는 비밀자금 전부를 독립운동에 썼다. 신채호와 연해주 한인사회를 독립운동 기지로 만들어 일본 유명인사 암살을 추진했다. 러시아는 러일 전쟁으로 처음엔 한국인들을 보호했지만 세계대전에는 러시아와 일본이 연합국으로 참전하면서 한인을 박해했다. 
 이종호는 이때 중국으로 가서 무관학교를 설립하면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을 했다. 1917년 가지고 있던 자금이 바닥이 나자 국내로 들어왔다가 체포되어 1년간 가택감금 생활을 당했다. 감금이 풀린 이종호는 의암 손병희를 찾아간다. 천도교에 맡긴 보성전문학교를 돌려받기 위해서였다. 손병희는 쾌히 승낙했다. 그러나 총독부 방해로 성사되지 못했다. 이때부터 할아버지가 제일은행에 맞긴 돈 찾는 일에 매달렸다. 현재 가치로 330억원에 달하는 거금을 손자인 이종호가 찾으려 한 것이다. 
 일제는 이종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와 탄압 회유공작 등으로 간섭했다. 당시 일제통감부는 학부를 통하여 보성학교를 관립화로 예속화하려는 계책을 써 학교운영경비를 기부하겠다는 등 회유책을 썼지만 이종호는 거절했다. 그러자 안중근사건 연루혐의를 씌워 체포되기도 했다. 이완용과 더불어 친일매국노인 송병준은 친일단체인 일진회 회장과 농상공대신, 내무대신을 역임하며 총독부 고문으로 있으면서 이 돈을 강탈하기 위해 협박과 구타까지 했던 것이다. 
 일제는 1909년 이토히로부미 암살사건의 배후자로 이종호를 지목했고,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을 계기로 해서 황실재산을 정리하고 있었다. 고종황제의 비밀 자금이 독립운동자금에 쓰인다는 걸 알고 황실자금을 동결하고, 고종이 지원하던 보성전문학교를 탄압하여 이종호를 축출하고 친일파 유승준을 교장으로 앉히려했다. 졸업생들은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떠나고 있었고, 또 재학생들도 애국청년들이었다.  
 1908년 이종호가 제일은행의 예금지급 운동을 시작하자 송병준은 이종호를 승녕부(고종의 임시관청)로 불러 이용익 통장은 정부 내탕금이니 도장과 통장을 내놓으라했지만 조부의 개인재산이자 유산이라고 거절했다. 그러자 송병준은 고종에게 달려가 이용익의 예금은 황실의 내탕금이니 마땅히 돌려받아야 한다고 했다. 고종은 이용익 개인재산이라며 오히려 송병준을 질책했다. 
 송병준은 계획이 무너지자 이종호를 체포하여 내무대신 관저 골방에 감금해놓고 통장을 내놓으라고 협박했다. 친일파 송병준은 일진회 회장이라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이종호는 할아버지의 유산인 거금을 빼앗길 위기에 놓이자 그의 절친 이갑이 나타났다. 이갑은 서북학회(애국계몽단체)에서 활약하던 육군참령이었다. 이갑은 하세가와 대장을 만나 이종호를 구해달라고 청했다. 하세가와 대장은 송병준을 꾸짖고 이종호는 감금 사흘 만에 풀려났다. 
 이종호는 하세가와 총독에게 억울한 사정을 하소연했다. 총독은 아직도 돈을 찾지 못했냐며 도와주겠다고 했다. 그러고는 경무총감부 고등과장 마에다 대좌를 제일은행에 파견하여 조사를 하도록 시켰다. 총독이 나서니 제일은행에서는 사라지고 없다던 서류까지 내밀었다. 제일은행과 벌이던 협상이 타결되기 직전 하세가와 총독은 3ㆍ1 운동의 책임을 지고 사직해 도쿄로 돌아갔다. 총독이 물러나게 되자 예금지급을 위해 협조하던 관리들과 제일은행 관계자들은 손을 뗐고, 이 일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송병준은 하세가와의 정적인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찾아가 이종호에게 돈을 내주면 폭동을 일으키는 정치자금으로 사용될 것이니 내주지 말라고 했다. 1909년 하세가와 군사령관이 일본으로 들어가자 송병준이 더 날뛰는 통에 이종호는 예금의 인출보다 목숨까지 위험해지고 있었다. 1909년 10월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에서 안중근의 총탄에 죽자 이종호는 사건 혐의자로 체포되기도 했던 것이다.  
 1920년, 이종호는 어떻게든 예금을 돌려받겠다고 결심하고 도쿄로 갔다. 이종호는 여기서 10여 년 전 천적처럼 대하던 송병준을 만났다. 송병준은 이종호를 반갑게 맞으며 지난 일을 사과했다. 그리고 자기가 증인이 되어 예금을 찾아주겠다고 했다. 일본의 유명한 로비스트 오쿠무라를 소개하며 그에게 맡기면 예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까지 했다. 그는 송병준의 말을 믿고 오쿠무라에게 전권을 맡기고 귀국했다. 
 오쿠무라는 중의원에서 이용익의 예금을 둘러싼 의혹을 폭로하여 사건을 공론화하였다. 그러나 정치적 압력으로도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자 오쿠무라는 1924년 도쿄지방재판소에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오쿠무라는 소장에 제일은행과 조선총독을 비롯한 이왕직 장관, 순종까지 피고로 적시했다. 문제가 소송으로까지 비화하자 총독부와 이왕직이 합의를 요구했다. 임금을 상대로 송사를 벌이는 것이 부담이 되어 이종호는 소송을 취하했다. 
 사이토 총독은 이종호를 총독부로 불러들여 제안했다. 총독은 이종호에게 20여 년이나 지난 일이라 제일은행에서는 지급할 돈이 없다고 하니 돈을 찾을 길이 없다. 그 대신 산림을 주겠다고 했다. 해결방법이 없던 이종호는 산림으로라도 돌려받으면 좋겠다고 하고 황해도 어느 산림을 불하 받을 작정이었다. 그 산림은 시가로 약 60만원이란 설이 있었다. 그러나 사이토 총독이 서울을 떠나자 좌절되고 말았다. 은행과 총독부를 상대로 무려 7년을 끌면서 이 마저도 성사되지 못했다. 교섭 중에도 궁내부 서류에는 예금이 인출된 흔적이란 어디에도 없었다. 예금은 국고로 환수된 것이 아니라 친일대신 중 누군가가 착복한 것이었다. 
 1904년 러일전쟁 직전, 친러파 이용익은 한규설 내각의 군부대신에 임명됐고 친일파인 송병준은 일진회를 조직했다.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이용익은 일본과의 조약체결에 반대했고, 송병준은 일진회를 통해 일본군에 물자를 공급하고 친일 선전에 적극 나섰다. 하야시와 일진회 회장 송병준이 결탁해 조정에서 친러파를 축출하면서 자금줄을 막는 음모를 꾸몄다.
 하야시는 제일은행 경성지점을 찾아가서 이용익의 예금 23만원은 황실의 공금이니  황실 예금으로 돌려놓으라고 강요했다. 제일은행은 아무리 공사의 명령이라 하더라도 개인 명의의 예금을 본인의 승낙도 받지 않고 다른 계좌로 돌려놓을 수 없다며 거부했다. 그러나 한 번의 거절로 포기할 하야시와 송병준이 아니었다. 하야시는 갖은 수단을 동원해 제일은행을 압박했다. 공사의 집요한 요구에 제일은행은 하는 수 없이 고미야 궁내부 차관에게 이용익 명의로 제일은행 경성지점에 예금된 23만원이 황실의 내탕금인지 물어보았다. 고미야는 금시초문인지라 승녕부 재무이사 조민희에게 물었고, 조민희는 다시 승녕부 총감 이대오에게 알아보았다. 사실 확인을 위해 여러 사람 입에 오르내리자 고종의 귀에까지 흘러 들어갔다. 고종은 당시 금광 여러 곳을 경영한 백만장자 이용익의 개인재산을 황실에서 간섭할 필요가 없다고 했지만 하야시는 대한제국 황제의 어명을 듣지 않았다.  
 하야시는 제일은행을 찾아가 강요했다. 제일은행은 하야시의 각서를 받고 23만원을 내장원경 윤웅렬의 명의로 돌려놓았다. 일본 최대 은행인 제일은행이 전권공사의 각서 한 장을 받아놓고 예금주 동의 없이 예금의 명의를 돌려놓은 희대의 사기극을 벌인 것이다. 하야시의 서명을 받은 각서는 재판부에 증거품으로 제출되었다. 윤웅렬의 명의로 이전된 돈은 인출은 됐음에도 사용처는 확인되지 않았다. 나라의 공금이건 사재이건 예금주의 승인 없이 은행이 임의로 개인명의의 예금을 다른 계좌로 돌려놓을 수 있는지가 핵심임에도 재판의 승패는 예금의 시효였다. 
 1심인 도쿄지방재판소와 2심인 도쿄복심법원은 30년이나 지난 예금은 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예금도 채권에 준해서 시효를 가진다는 제일은행의 주장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예금에 시효가 있다는 것을 인정한 역사상 첫 판결이었으나 3심인 대심원에서 당좌예금에는 시효가 없으니 다시 심리하라며 2심 판결을 파기해 도쿄복심법원으로 환송했다.
 원고의 예금은 이용익의 소유가 아니라 궁내부의 내탕금이고, 이용익이 살아있을 때 내장원경 윤웅렬의 명의로 변경되었고, 대부분 지불했을 뿐만 아니라 잔액은 시효에 의해 소멸했다는 것이 확정 판결 이유였다. 이종호는 1930년 도쿄지방재판소에 정식으로 예금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조부의 통장을 손에 넣은 지 무려 24년 만이었다. 법정 공방은 그로부터 여섯 차례에 걸쳐 9년간 이어졌다. 3심인 대심원에서 한 차례 원심파기가 있었고, 대심원의 확정판결 후 한 차례 재심청구가 있었다.  
 1907년부터 예금을 찾기 위해 25년간 뛰어다닌 이종호는 1932년 1심 판결도 보지 못한 채 협심증으로 사망했다. 그 뒤 소송은 그의 아우 이종관이 주도했다. 1930년부터 9년을 끌면서 진행된 여섯 번의 재판은 1승5패로 끝이 났다. 이종호는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10년이 넘도록 고생만 하다가 결국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쓸쓸한 단칸방에서 1932년 46세로 그 유명을 달리했다. 1962년 건국훈장 애족장 서훈을 받았다. 
 매국노 송병준(1858-1925)의 묘는 그 후손들이 파묘하여 유골은 화장한 것으로 밝혀졌다. 구한말 양지현감으로 용인 추계리에서 99칸의 대저택에 일본낭인들과 함께 기거하면서 친일매국노인 이완용과 더불어 친일단체인 일진회 회장과 농상공대신과 내무대신을 역임하며 총독부 고문으로 친일행위를 벌였다. 그의 아들 송종헌 역시 추계리에 거주하며 항일의병을 잡아들이는데 앞장을 섰고 일본 귀족원의원을 지냈다. 그의 사위는 명성황후 살해사건의 행동대원으로 알려졌다.

 

저작권자 © 양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