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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이섭 (田悧攝 / 1976~)

 30년 전,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주민번호이다. 뒷자리는 내 번호와 일치한다. 천성산을 바라보면, 특히나 나무작업을 할 때면 유독 할아버지 생각이 많이 난다.
 참나무가 많은 천성산을 작업장으로 평생 숯을 구워 번 돈으로 야산을 사들이고, 온몸으로 개간하여 논밭 일궜던 할아버지는 새벽부터 소주 한 모금으로 목을 적시고 작업 나서기위해 톱 줄질을 하신다. 백발가, 옥설가, 농부가, 회심곡, 조선13도 등 갖가지 소리를 하시며 일을 하신다. 마을에서 농악이라도 하면 상쇠 역할을 하며 꽹과리를 참 잘 두드리셨다.
 바지게에 곡괭이, 삽, 낫, 톱, 여벌의 옷과 소주 됫병을 얹어가시던 할아버지는 술 힘으로 버텨가며 일하시고, 해질녘 내려오셔서는 손자들을 목마 태우고 덩실덩실 춤추며 힘든 줄도 몰라 하셨다. 여벌의 옷을 준비해 가는 이유는 일마치고 내려오며 계곡에서 씻고 갈아입고 내려오기 위함이다. 우리 마을은 산자수명 (山紫水明)한 곳으로 타지인들의 출입이 많았던지라 혹여나 도회지 사람들 보기에 시골사람 더럽다고 흉 볼까봐 그러셨단다. 
 빈농의 집으로 당시 소학교도 못 나오셨지만 사람들은 학률(할아버지의 함자)정승이라 불렀다. 너그러운 분이라 여간 성질나는 일이 있어도 "허이 참!" 헛기침 한 번으로 끝나는 분이다. 집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 보이면 그냥 못 보낸다. 막걸리 한 사발이라도 마시고 가기를 권한다. 그래서 엄마의 고된 시집살이 중 또 하나는 술 빚기였을 정도다. 이런 필부(匹夫)의 할아버지가 내게는 진정한 예술가로 각인되어 있기도 하다. 고단한 일상에서도 소박한 음주가무와 여유로운 삶 속의 예술을 즐기셨던 분이다. 
 내가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짧은 재주가 있다면 뭇 사람들보다 나무를 좀 잘 다룬다는 것이다. 할아버지의 창고로 들어가 보면 갖가지 농기구들과 연장들이 즐비했다. 창고에서 톱을 꺼내 들고 뒷산으로 올라가 대나무 베어 와서 낫으로 쪼개고 다듬어 연 만들기를 하는 등 어릴 때부터 도구 사용법을 보고 자라왔던 나로서는 특별히 배우지 않고도 자연스레 익혔다.

할아버지의 흙담

 너무 안타깝고 아쉬운 것은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할머니께서 "저 연장들을 보면 엉성시럽다.(진절머리난다.)"하시며 나무로 된 건 다 태워버리고, 철물로 된 건 고물장수에게 다 줘 버렸단다. 그래서 지금 할아버지의 모습을 되새김질 할 만 한 물건은 남아있지 않다.
 다행히도 아버지 태어나기도 전, 만들었다는 70년 이상 된 흙담이 집 뒤에 한 쪽 이라도 남아 있어 수리를 해 가며 보존하고 있다. 집과 연구소를 오가는 사이에 있는 이 흙담은 할아버지의 넉넉하고 인자한 모습으로 나와 우리 가족들을 보살펴주고 있는 듯하다.

  서두부터 내 할아버지 이야기로 시작함은 내 머리와 가슴이라는 저장소가 기억하는 할아버지의 흔적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1988년 6월, 모심기를 마쳤던 그날, 위암 투병으로 누워계시던 할아버지는 조용히 천성산 위 하늘나라로 가셨다. 할아버지의 도구들을 만지던 내 손은 할아버지의 여유롭고 너그러웠던 인품과 온화함을 온전히 기억하고 있다.

물질적 증거의 저장소

 이러한 개인사적 기억 저장의 장소를 확대해서 지역 또는 국가 단위, 분야별로도 살펴볼 수 있겠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사회문화적 저장의 장소는 박물관이다. 이를 의미하는 영어 뮤지엄(museum), 프랑스어 뮤제(musee), 독일어 뮤제움(museum) 등은 모두 고대 그리스의 뮤즈(Muse)여신에게 바치는 신전 안의 보물창고인 무세이온(museion)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철학원 또는 사색의 장소를 의미한다고 한다.
 박물관은 형태, 내용, 기능에 있어서 매우 다양하지만 인간과 인간 환경의 양상에 관한 물질적 증거를 조사하여 수집하고, 연구과정을 거쳐 전시를 한다는 공통된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때의 물질적 증거란 문화적 가치가 있는 모든 것을 의미하는 것이겠다. 최근의 박물관은 수집, 보관의 기능 중 문화유산 관리가 급격히 늘어가는 추세이며, 교육활동에 큰 비중을 두고, 재미와 편안함의 요소를 두루 갖추며 기능적 측면에서도 다양하게 변모되어 가고 있다.

 

문화해설사(전대식 해설사)의 안내

 우리 지역 양산에도 2013년 4월 개관하고 5주년이 된 양산시립박물관(관장 신용철)이 있다. 박물관에서는 어린이를 대상으로 <토요문화강좌>, <어린이 방학 역사교실>을 비롯하여 성인 프로그램으로는 최근 `우리 지역 문화재 바로 알기`를 주제로 5기까지 진행한 <박물관대학>과 <교사연수프로그램>, 매월 셋째 주 마지막 금요일 실시하는 <문화가 있는 날>, 매월 둘 째, 넷 째 주 일요일 실시하는 <일요 가족영화 상영>, <해피위크엔드 콘서트> 등의 주말 프로그램이 있으며 친절한 문화해설사 선생님들이 교대 근무하며 상세한 설명으로 이해를 도와주고 있다.

  지난 달 30일에는 `삽량의 밤을 수놓다`라는 부제로 두 번째로 개최한 <달빛고분야행(夜行)>행사를 통해 체험, 전시, 공연, 강연 등의 프로그램으로 시민들과 만나는 자리를 가졌다. 이렇듯, 박물관은 다양한 대상과 장르의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다. 박제된 유물만 전시하는 곳이 아니라 옛 자료의 고증을 통해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잇는 가교의 장이자, 시민들과 공유, 소통을 해 나가고자 새로움을 계속 생산해 가고 있는 문화예술교육의 현장이기도 하다. 

지역을 읽어내는 또 다른 물건

 양산시민의 한 사람으로 양산시립박물관을 높이 평가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개관 이래 양산부부총 전시를 비롯하여 황산강 가야진, 천성산, 양산 도자기, 1874 한양으로 떠난 세 사람 이야기, 황산역, 사찰벽화 등 특별기획전을 개최해오며 양산의 과거와 다양한 문화를 통해 역사적 정체성을 찾아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음에 주목한다.
 아울러, 개관 초기 복제품(replica) 위주의 전시물을 5년간 차츰차츰 개선해오며 부족한 예산에도 타 박물관의 집기류들을 용도 전환까지 해 가며 보다 나은 전시효과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지난 5월 새롭게 문화재로 지정된 `구포복설상서(龜逋復設上書, 경남 문화재자료 641호)`는 가까운 거리에서 관람 가능하도록 특수 진열장인 무빙월(Moving wall)을 활용하였다. 

신용철 관장의 `양산 반닫이` 설명

 특히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문화재 공개를 통해 양산의 다양한 역사문화와 예술적 우수성을 보여주고 있다. 예로부터 명성이 뛰어나 양산을 대표하는 목가구인 `양산 반닫이` 코너를 신설했다.
 신용철 관장은 몇 해 전, 통도사에서 삼베 재질의 장막을 보관하는 큰 반닫이를 보고 놀랐는데 그 외에도 더 다양하고 많은 반닫이와 갖가지 목가구들이 있어 감탄했다 한다. 2년 쯤 뒤에는 양산 반닫이로 특별 기획전을 해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고민해 본단다.
그 기획에 미력하나마 일조할 기회가 있다면 더욱 좋겠다.

 반닫이는 앞면이 두 쪽으로 갈라져 반쪽만 열리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데 장과 농을 혼수로 마련할 수 없었던 옛 서민들에게는 중요한 혼수품이었다. 주로 옷이나 문서, 그릇, 제기 등을 보관하였는데 운송수단이 발달하지 않았던 예전에는 지역마다 고유의 특성이 이어져 올 수 있었고 대표적인 것으로는 경기도의 `강화 반닫이`, 평안도의 `박천 반닫이`, 전라도의 `나주 반닫이`, 경상도의 `밀양 반닫이`와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우리 양산의 `양산 반닫이`가 있다. 
 `강화 반닫이`는 비례미가 뛰어나고 고급스러우며 경첩에는 卍(만)字가 투각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고, `박천 반닫이`는 장석이 숭숭 뚫려 있어 `숭숭이 반닫이`라고도 하며, `나주 반닫이`는 간결한 디자인에 경첩이 긴 사각 모양에 굵게 튀어나온 못이 규칙적으로 배열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며, `밀양 반닫이`는 면과 면을 잡아주는 거멀잡이와 경첩 가운데의 코붙임 장석이 특징이다. 과연, `양산 반닫이`는 어떠할까? 비록 몇 점 전시되어 있긴 하지만 향후 기획전을 계획하고 있다 하니 기대가 크다. 
 이처럼 `반닫이` 같은 가구들은 크기나 형태, 재료, 나뭇결, 장식의 모양 등이 저마다 달라 그것을 사용했을 사람들의 생활을 읽어보고, 지역을 이야기하는 또 다른 코드가 되는 생활 속 문화유산이다. 물질적 증거의 우수함으로 우열을 이야기하고자 함이 아니다. 현재에 마주하고 있는 과거의 물질을 통해 문화적 가치를 가늠해보며, 지역의 역사를 읽어보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또 다른 계기로 받아들임이 어떨까?
 반닫이는 멀찌감치 물러서서 지긋이 보고 있으면 마치 웃고 있는 듯 한 사람의 얼굴 같아 보이기도 하는 묘한 가구이다. 
 양산의 또 다른 기억을 찾아가고자 다양한 노력을 시도하고 있는 양산시립박물관에도 많은 시민들의 관심과 발걸음이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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