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나무
 "할아버지!, 할아버지!" 형과 함께 도시락을 들고 골짜기 떠나가도록 할아버지를 외친다. 산에서 논, 밭 개간 일 하신다고 곡괭이 들고 땀 흘리던 할아버지는 손자들의 외침에 가파른 내리막길을 절룩절룩 내려와서는 바위에 걸터앉고 손자 둘을 무릎 위에 올려놓으며 힘들었을 본인은 뒤로 한 채 큰 손자 한 숟가락, 작은 손자 한 숟가락 밥을 떠먹여주신다. 먼 오르막길을 도시락 들고 땀 흘리며 올라 온 손자들에 대한 할아버지의 배려이자 사랑이었다.
 그 장면에 함께 등장하는 건 보라색 종 모양의 꽃을 피우며 큰 부채만 한 초록 잎사귀를 하늘거리고 있는 키 큰 두 그루의 오동나무. 때는 1980년대 초, 내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 우리 일가의 흔한 모습이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장소는 천성산 아래 홍룡폭포 올라가는 언덕길 왼쪽 편으로 길쭉하게 뻗은 진등산과 그 골짝으로 내려오는 개울가 근처이다. 지금도 15~20M 가량의 키 큰 오동나무 두 그루가 있는데 최근 공사를 하며 포클레인 기사들이 가지를 마구 훼손해버려 죽어가고 있다. 수십 년을 버텨온 나무를 함부로 다루는 그들이 너무 밉다. 나는 이 오동나무를 보면 우리 할아버지가 생각난다. 계절은 온통 푸르름으로 변해가는 이 무렵에도 한 평생 산과 들에서 일 하시던 할아버지 모습이 역력하다. 오동나무는 내게 그런 추억을 안겨 준 소중한 나무이다. 
 
 지아나무 벽오동
 "아들을 낳으면 대들보감이 되라며 소나무를 심고, 딸을 낳으면 오동나무를 심어 시집갈 때 가구를 만들어 보낸다."는 말이 있다. 나도 6년 전 딸 지아가 태어나고 이듬해 산에서 어린 벽오동나무를 캐 와서 연구소에 심었다. 결혼할 때 가구 만들어 줄 요량으로 심은 나무는 아니다. 봉황이 깃든다는 벽오동처럼 고귀한 사람이 되어라, 늘 푸르고 곧은 벽오동처럼 밝고, 올곧은 사람으로 성장해가라는 의미로 심은 나무이다.
 그런 의미를 부여하고 나니 늘 눈이 가고, 손길이 간다. 바람이 거세면 행여나 가지가 상하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게 되고, 최근에는 꽃봉오리에 진딧물이 생겨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약 치기를 수차례 해가며 정성을 들이고 있다. 아이 키우는 것처럼 아이 이름으로 나무를 명명하였으니 나무에도 정성이 가기 마련인 것이다. 3년 전에는 아들 지안이가 태어나고 공작(수양)단풍을 심었다.
 
 十年之計 莫如樹木
 「一年之計 莫如樹穀(일년지계 막여수곡), 十年之計 莫如樹木(십년지계 막여수목), 終身(百年)之計 莫如樹人(종신(백년)지계 막여수인)」 관포지교(管鮑之交)로 잘 알려진 중국 제(齊)나라의 정승 관중(管仲)이 저술한 「관자(管子)」라는 책에 들어 있는 글(권수`權樹`편)로 여기에서 나무 이야기를 해 보기로 한다. "십년의 계획은 나무를 심는 것이다."란 말이다.
 나무는 자연의 대표로서 집을 짓고, 가구와 도구를 만드는 목재와 몸에 좋은 약재를 쓰임으로 그 의미를 부여받아 왔다. 나무는 그것으로 만든 생활도구들로 정신과 몸을 맑게 해 주었고, 머리맡에 심고 평생의 친구로 삼을 줄도 알았다. 나무에 대한 고마움과 애정이 글과 그림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고 그것들이 쌓여 정신문화의 축을 이루어왔다.
 나무는 잎에서 이산화탄소(CO2)를 흡수하고, 땅 속의 뿌리에서는 물(H2O)을 빨아들이며 태양에너지를 이용하여 자신에게 필요한 영양분을 만드는 광합성작용을 한다. 나무 한 그루가 뿜어내는 산소량은 4인 가족이 하루 동안 숨 쉴 수 있는 양이며, 1ha(100M*100M)의 숲에서 1년간 만들어 내는 산소의 양은 12톤이며, 16톤의 이산화탄소(CO2)를 흡수한다. 한 사람이 하루에 필요한 산소의 양은 0.75Kg이므로 1ha의 숲이 생산하는 산소는 45명이 1년간 숨 쉴 수 있는 양이 된다. 
 이렇듯 나무는 종이 등 생필품을 만드는 자원, 자연재해를 예방, 지구온난화 예방, 공지정화 등 우리 인간들에게 무한 사랑을 주는 존재이다.
 가구디자인과 목공예를 전공으로 공부해오고, 창작활동을 하고 있는 나의 입장에서 나무라는 존재는 더 크게 다가왔고, 디자인이라는 조형과 쓰임이라는 실용의 측면 이전에 나무의 본질인 물성에 대해서도 남다른 애착과 연구를 진행 해 왔었다. 더욱이 자연에서의 삶을 위해 10년 전 귀향하고부터는 해마다 나무 몇 그루씩 심어가며 사계절 흙 속에서 초목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나무가 전해주는 삶의 온기와 긍정의 에너지를 실로 크게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나와 함께 하고 있는 느티나무, 은행나무, 단풍나무, 호두나무, 매화나무, 모과나무, 팽나무, 소나무, 잣나무, 편백나무, 닥나무, 감나무 등등 많은 나무들이 있지만, 여기에서는 오동이라는 나무에 대해서 그 존재와 가치 등을 시서화의 문화예술로 이야기 해 본다. 그동안 나무는 그 자체로서 사회, 환경적 관점에서 접근 해 온 것이 많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양한 글과 그림 속에서 우리 전통의 삶과 정신적 가치, 풍속사적 관점 등에 대해서도 말해주는 수많은 정보들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문화예술과 오동나무
 오동(梧桐)의 오(梧)는 일반적으로 벽오동을 의미한다. 일본의 식물학자 호미키 유에키(植木 秀幹 1892~1977)가 붙인 학명에는 오동이 한국 원산이라는 코레아나(Paulownia coreana)로 표기되어 있다. 
 오동나무는 「제민요술」이나「본초강목」등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가볍고 무늬가 아름다워 가구재(문갑, 장롱의 판재나 서랍)는 물론 가야금, 거문고 등 전통악기를 만드는데 사용되었다. 
 손톱으로 긁혀질 정도로 표면은 약하지만 가볍고, 강도가 있으며 습기에도 강하고 잘 섞지 않으며 뒤틀림도 적고 해충의 피해도 없다. 가구 서랍재가 무겁거나 뒤틀리면 그 본연의 역할을 못할 것이 아닌가, 악기 역시 무겁거나 틀어지는 성질의 나무라면 악기의 역할을 할 수 없기에 오동나무는 최적의 재료가 되는 것이다.

오동은 세월을 가늠하는 나무이다. 오동 꽃 피는 것을 보고 신록의 봄을 느끼며, 오동 잎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들은 가을을 느낀다. 중국 남송시대 주희(朱熹 1130~1200)의 「勸學文(권학문)」에서도 그 기운을 짐작해볼 수 있다. 
대학시절, 교양수업으로 서예를 배운 적이 있는데 그 당시 교수님께서 써주신 글이다.
(소년이로학난성) : 젊은 날은 늙기 쉽고 학업은 이루기 어려우니
(일촌광음부가경) : 아주 짧은 시간이라도 하찮게 여기지 말라
(미각지당춘초몽) : 아직 연못가 봄풀은 꿈이 깨지도 않았는데
(계전오엽이추성) : 계단 앞 오동잎은 벌써 가을 소리를 내는구나

 

  오동은 시적 상상력을 자극한다. 시인 이윤학은 이렇게 노래하였다. 나무에 대한 세심한 관찰이 얼마나 뛰어난 삶의 비유로 다시 태어나는가를 잘 보여주는 시다. 오동나무 잎과 줄기, 꽃이 피어있는 모습이 연상되지 않는가?

 

오동나무 꽃

 

오동나무 

그의 빈속으로 들기 위하여 
나는 그 나무를 자를 수는 없었다. 
깊은 생각으로 불면의 나뭇잎을 
흔들었는데, 쥐어뜯었는데 달빛이 한 바가지 
쏟아져 몽글몽글 피어오르고 있었다. 

오동나무 열매

피어오르고 있었다, 먹고 싶은 생각이 
멀리멀리 떠나고 

고요하여라, 바닥에 떨어진 부채 
입을 모으며 부서지는 추억, 
벌레는 
벌레는, 저렇게 높은 곳에서 무얼 하나? 

 

강세황(姜世晃)의 벽오청서도(碧梧淸暑圖)1750, 종이에 담채, 30×35.8Cm

鳳凰 非竹實 不食, 非梧桐 不棲 (봉황 비죽실 불식, 비오동 불서) 
 봉황은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 않고, 오동나무가 아니면 깃들지 않는다.
 이황과 조식의 제자였던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는 함안에 대나무와 천 그루의 벽오동을 심었다고 한

김홍도(金弘道)의 단원도(檀園圖)1784, 종이에 담채, 135×78.5Cm

다. 뒷산이 봉황이 날아가는 비봉형(飛鳳形)자세를 보였기에 대나무와 벽오동을 심어 봉황이 날아가지 않고 오래도록 깃들게 하기 위한 풍수적 처방이었다.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1538~1593)도 자신의 별서 석문정사(石門精舍) 동쪽에 벽오동을 심었다 하고,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명례방(지금의 명동)의 자기 집에 산다화, 파초와 더불어 벽오동이 있다고 썼다. 중국에서도 벽오동은 중정(中庭)이나 내정(內庭) 또는 창선정(窓先庭)등 문인의 집 뜰에 심었던 중요한 조경식물이었다. 이처럼 벽오동은 깨끗하고 귀족적인 선비의 나무로 알려져 서당이나 서재 부근에 자주 심어졌다 한다. 
 한 쌍의 벽오동 아래 초가에 앉아 비질하는 아이를 바라보며 더위를 식히는 선비의 모습을 그린 광지(光之)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의 벽오청서도(碧梧淸暑圖)는 선비의 청빈함을 잘 나타내고 있다.
 단원도(檀園圖)에서는 거문고를 타고 있는 사람(김홍도), 오른손을 들고 시를 읊고 있는 사람(정란), 둥근 부채를 들고 비스듬히 앉아 감상하고 있는 사람(강희언)들 모습 주변으로 마루 위에 놓여 있는 문방사우와 술병, 방안의 서탁과 백자, 벽에 걸린 비파와 함께 이 집의 운치를 높이고 있는 후원 주변의 오동나무, 버드나무 등에서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1745~미상)가 일상적으로 누렸던 풍류생활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나무의 도시 양산으로

  존경하는 일본의 기업 경영인이 있다. 물가가 뛰고 인건비가 오르더라도 Made in Japan과 Hand Made를 고수하며 나라사랑, 자연사랑과 나무에 대한 애착으로 사람에게 유용한 가구를 제작해 오고 있는 ‘오크 빌리지(Oak Village)’의 이나모토 타다시(稲本 正)사장님이다. 토요타 자동차로부터 지원을 받아 자연환경교육과 리조트를 겸하는 ‘토요타 시라카와고 자연학교’의 초대 교장이며 환경운동가, 저술가로도 활동하고 계신 분이다.

“어린이 한 명 도토리 한 알”이라는 기업의 이념을 구현하고자 가구 제작을 위해 나무가 베어져 나갈 때 새로운 나무를 자라나는 아이들을 통해 심어나가는 ‘NPO 도토리회’도 운영하고 있다. 순환형 환경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그 속에 교육도 있는 것이다. “100년 키운 나무는 100년 사용할 수 있는 물건으로”라는 그의 말에는 큰 울림으로 다가오기까지 한다. 유학시절 그 분과의 만남은 내게 앎에 대한 실천의 모습과 세상을 바라보는 다양한 마음의 자세를 일깨워주었다.

여지없이 올 해 선거에도 나무와 숲을 빙자한 공약(空約)들이 활개를 쳤다. 매번 선거 때마다 친환경, 항노화, 의생명, 생태관광, 수목원, 휴양림, 산림생태체험교육장 등을 들먹이며 나무와 숲을 이용해 왔다. 진짜 당선이라도 되면 지켜지기나 할지, 그래도 甲男乙女(갑남을녀)의 우리들은 半信半疑(반신반의)하며 제발 공약으로 내세웠으면 지켜지는 공약(公約)이 되었으면 기대를 하게 된다. 10년이 아니더라도 적어도 4년을 내다보는 공약(共約)이기를 바란다. 지역의 정치가든, 기업인이든, 일반 시민이든 모두 함께 나무를 대하고, 자연을 대하는 올바른 의식을 만들어 나갔으면 좋겠다.

우리 양산에도 ‘양산숲길보전회’ 같은 모임이 있다. 지역의 명산과 숲을 산행하며 지역의 역사를 되짚어보고, 산천초목들에 대해 공부하며 환경보호 활동과 함께 지역민들과의 좋은 유대관계도 만들어가는 등 자연사랑과 지역사랑, 사람사랑을 배움과 실천으로 이어가고 있는 모임이다. 이러한 모임들을 더 활성화시키고 어린 세대들에게까지 확산시켜 나무의 도시 양산, 환경이 깨끗한 양산, 사람살기 좋은 양산을 만들어갔으면 한다.

十年之計 莫如樹木(십년지계 막여수목) 나무로 울창해지는 양산이기를 기대해본다. 녹음 짙은 계절에 田

 

전이섭(田悧攝) / 일본 무사시노미술대학 대학원에서 공예공업디자인, 도쿄가쿠게이대학 대학원에서 교육학을 전공하고, 동아대학교 대학원에서 교육학(교육철학)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현재 부산문화재단에서 문화유산(조선통신사, 피란수도 세계유산)관련 사업들을 담당하고 있으며, <문화교육연구소田>를 통해 `실사구시(實事求是)`하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양산 토박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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