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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의 보스`빵공장` 보스되다출소자들의 재범 막기위해 공동체 설립
100% 우리밀로 만들어 건강에 좋아
방부제를 사용하지 않고 빵 제조

▲ 남들과는 조금 다른 과거를 살아오셨습니다.
 사실 저는 깡패조직의 보스였습니다. 어렸을 때는 소매치기로 소년원을 전전했고, 성인이 되어서는 터미널을 관리하는 조직의 보스가 되었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싸움을 일삼았죠.
 저는 1960년 부산에서 태어났습니다. 5남2녀 중 넷째였죠. 부모님이 동네에서 얼음 장사를 했지만 형편이 썩 좋지 못했습니다. 더욱이 아버지는 얼음을 팔기보다 노름판에 가 계신적이 더 많았죠.
 어머니는 7명의 아이를 키우기 위해 매일 얼음을 지고 동네를 도셨습니다.
 4살 때 이모집으로 입양을 갔다가 6년 만에 돌아온 집에 제 자리는 없었습니다. 
 부모님도 먹고살기 바빠 저에게 신경을 쓰지 못했죠.
 집에 있으면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것처럼 불편하고 숨이 막혔습니다. 가족에 대한 미움이 커질수록 조금씩 제 마음도 삐뚤어 졌습니다.  
 결국 저는 부모님의 금고에 손을 대기 시작했고 그럴 때면 형님들께 죽지 않을 정도로 두들겨 맞곤 했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니 나도 이제 어른이 됐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중학생이 되고 집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결심을 하고 집을 나섰습니다. 그리고 무작정 집에서 멀리가는 버스를 잡아탔습니다.
 낯선 거리생활을 해도 마음만은 편했죠.
 먹고싶은 것 먹고 하고싶은 것 하고..
 하지만 가출할때 들고 나간 돈이 떨어지자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끼니를 걸러야 할때마다 집으로 돌아갈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외로움과 불안감에 지쳐갈 무렵 저와 비슷한 처지의 또래들을 만났습니다. 사람들의 주머니를 털며 거리를 떠도는 소매치기들이었죠.
 새로 만난 거리의 가족들은 그들의 방식으로 저를 챙겨주었고 소매치기 기술까지 알려주었습니다.
 5일장이 선 장터에서 처음 소매치기를 하던 날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지갑을 손에 넣고 현장을 빠져나와 지갑 속 돈을 확인할 때의 그 순간이요.
 
▲ 소매치기범에서 어떻게 조직의 보스가 되셨습니까?
 소매치기로 소년원 생활을 전전하다 나왔습니다. 다시는 소매치기조직에 들어가기 싫었습니다. 소매치기를 하다 보면 다시 소년원에 갈 것만 같았습니다.
 무작정 둘째 형님을 찾아갔습니다. 당시 형님은 시외버스터미널 인근에서 노점을 하고 계셨습니다.
 터미널에서 출발하는 버스에서 오징어, 계란, 껌 등을 파는 조직의 중간 보스였죠. 시외버스터미널은 텃세가 강한 곳이었기 때문에 멋모르고 물건을 팔거나 구걸을 하면 맞고 쫓겨나기 일쑤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미 자리 잡은 형님 밑에서 일했기 때문에 쫓겨날 일은 없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그곳에서 껌을 팔기 시작했습니다. 
 하루 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저에게도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터미널 버스에서 오징어, 땅콩을 팔게 된 겁니다.정말 열심히 뛰었습니다. 장사도 잘 됐고 상납도 잘했습니다. 18살이 되던 해 저는 터미널 `오야붕`의 눈에 들게 되었습니다.
 상납을 잘하니 저를 예쁘게 봤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제게 터미널 하나를 관리하라고 했습니다. 
 저에게 고개 숙이는 사람들이 생겼고 형님이라 부르며 저를 따르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뿌듯함을 느꼈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독종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독종이라는 말을 들을수록 수입도 늘어났으니깐요. 
 이후 저는 `터미널파 오야붕 싸움` 이라는 지역신문 기사의 주인공이 됐습니다. 그리고 저는 다시 교도소에 들어가게 됐습니다.
 

▲ 조직의 보스가 종교인이 되셨습니다.
 저에게 신앙은 다른 나라 이야기였습니다. 저를 알던 사람이라면 도저히 믿지 못할 일이 벌어진 겁니다.
 당시 저는 창원 양덕에 살았습니다. 하루가 멀다하고 아내에게 주먹을 휘두르던 시절이었죠.
 어느 날 집 주인 아주머니가 늘 어두운 얼굴로 지내는 제 아내의 모습을 보고 물었습니다. 아내는 그 순간 쌓인 감정을 쏟아내며 말했습니다.
 자초지종을 들은 주인집 아주머니는 말했습니다. "새댁! 지금 당장 도망가는 게 맞는 것 같아. 하지만 마지막으로 성당에 한 번 나가보는 게 어떨까?"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아주머니는 성당에 나가보고도 나아지는게 없다면 그때 아이를 데리고 도망가라며 아내를 위로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저였습니다. 눈도 똑바로 마주치지 못할 만큼 무서운 남편에게 성당을 가자고 말할 엄두가 나지 않았겠지요. 
 어느 날 아내가 저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에게 처음으로 부탁합니다. 같이 성당에 나가보아요"
 그렇게 아내와 난생 처음 성당이라는 곳을 가게 됐습니다. 그곳에서의 시간은 길고도 지루했습니다. 
 첫번째, 두번째, 세번째 도전하던 어느날 그날도 어김없이 친구들과 약속을 잡았습니다. 
 잠시 성당을 들렸다가 집으로 가 잠깐 눈을 붙이고 친구들에게 갈 생각이었는데 잠시 눈을 감았다 뜬 것 같은데 다음날이 되어 있었습니다.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아침을 먹으며 TV 뉴스를 틀었습니다. 그 화면에 어젯밤 만나기로 한 친구들이 살인사건 용의자로 TV 화면 속에 나왔습니다.
 그 순간 제 머릿속에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빵공장은 어떻게 하시게 되었습니까?
 그 당시 저는 포장마차 수입으로 7년 정도 공동체의 살림을 꾸려나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자동차가 대중화되고 고속철도가 생기면서 시외버스터미널이 폐쇄되고 있었습니다.
 식구들이 모여 대책을 논의하는데 마침 빵 기술이 있는 형제가 손을 들었습니다.
 그 형제는 자신이 빵을 좀 만들 줄 아니 빵을 만들어서 팔면 되지 않겠냐고 말했습니다.
 걱정이 되긴 했지만 다른 방법은 없었습니다.
 가게는 양산시장 안에 차리기로 했습니다. 이왕 만드는 빵이니 사람몸에 좋은 우리밀로 만들자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가게 이름도 `우리밀 빵`이라고 지었습니다. 그렇게 2006년 3000만원을 빌려 빵집 문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자기만 믿으라고 큰소리치던 형제가 한마디 말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며칠동안은 친분이 있던 분에게 부탁드려 보름 정도 빵을 만들었지만 언제까지 부탁을 할 수 만은 없었습니다.
 그렇게 첫 가게를 6개월만에 팔게 되었습니다. 첫 가게가 망하니 한동안 밀가루만 봐도 속이 쓰리고 머리가 아팠습니다. 그런데 빵과의 인연은 끊을 수 없었나 봅니다. 
 이번에는 호두과자를 팔게 됐습니다. 어차피 제빵기구는 갖고 있었고 다른 식구 중에 식빵 정도는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있었으니 먹고살려면 그거라도 팔아야 했죠.
 그렇게 하루하루 시간이 흘러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주)이레우리밀 빵 자랑좀 해주세요
 저희 빵은 100% 우리밀로 만들어 소화가 잘되고 암환자 분들이나 당뇨가 있으신 분들이 드셔도 괜찮습니다.
 또한 빵의재료가 되는 찰보리도 농협에서 공급받고 있으며 모든 빵에는 방부제가 들어가지 않습니다.
 물론 맛도 있으면서 가격도 10년째 올리지 않고 있습니다. 
 재료비가 많이 올라 수익은 크지 않지만 그래도 가격을 올리지 않는 것이 받은 사랑에 보답하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양산시민여러분들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권수상 기자  luman7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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