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조선시대 보부상 모습
사진: 조선시대 보부상 모습
사진: 개성상인 복식부기장부 문화재 등록

보부상으로 돈 모아 금광투자로 거부가 된 이욕익

나라의 재정을 위한 왕실재정 충당금으로

사라진 제일은행 `백만원 예금`과 손자 이종호의 독립운동 

친일파 송병준과 조선총독부가 벌인 음모

 

보성전문학교(지금의 고려대학)를 창시한 인촌 김성수 이전에 구한말 이 나라의 내장원경을 지낸 이용익이 있었다. 보부상 출신 정치인 이용익은 풍전등화 조국을 위해 헌신하였으나 일제와 그 앞잡이들에 의해 가장 많이 폄하되고 축소된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업적은 마지막 구국운동의 결실인 보성전문학교의 탄생이다. 
이용익(李容翊,1854-1907)1854년 함북 명천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풍문이 돌았다. 구한말 한미한 집안의 자식이었던 그가 출세를 결심하게 된 계기는 사또의 말잡이를 하다가 사소한 일로 크게 곤욕을 당하여 그에 대한 한을 갚기 위해서였다는 등 여러 가지 풍문이 있으나 그의 조부 이광집은 무과에 급제하여 승정원 좌승지를 지냈고, 부친 이병효는 고산현감, 전주진관 등 무반 벼슬을 지냈다. 관리의 아들이었음에도 글공부를 하지 않고 등짐을 진 보부상 등 천역을 전전하다가 열여덟 살에 금(金)을 채굴하기 위해 함경남도 갑산금광에 일찌감치 들어가 금꾼이 되었다. 
이용익은 고종의 최측근 경제관료 이기 전에 그는 함경도와 강원도 일대에 다수의 금광을 소유한 백만장자였다. 세종 이후 금지되었다가 열강의 이권 침탈로 인해 풀리게 된 광산 개발에 참여하는데 여기서 4년 동안 캐 모은 금덩이 한 짐 등에 짊어지고 천리 길을 걸어 한양에까지 와서 고종임금께 올렸다. 전 재산인 어른 주먹 크기의 금덩이를 여러 개를 등에 무겁도록 짊어지고 자신의 주머니가 아닌 나라살림을 위해 가져간 것이다. 
고종은 신장 6척(180cm)의 잘생긴 쾌남의 걸물의 이 고마운 청년이 시골 사내지만 꾸밈없이 순직한 말씨와 기골 장대한 풍채를 보고 앞으로 국가에 유용한 인물로 쓰일 거라는 생각에 답례로 다른 금광의 채굴권을 안겨준다. 이 청년은 또 다시 금맥을 발견하여 여타 금광보다 더 많은 생산을 내었다. 그렇게 채굴된 금조차 나라의 재정을 위해 왕실재정 충당금으로 거침없이 내놓았다. 
몰락 양반가의 자손으로 등짐장수까지 마다하지 않던 이 청년을 고종은 앞으로 나라에 걸출한 인재가 될 것을 예감하고 관직을 주었다. 그는 왕실재정 책임자인 `내장원경`에 임명되기에 이르고 나아가 지금의 기획 재정부장관 격인 탁지부대신이 되었다. 내장원경은 황실의 재산을 관리하는 내장원의 수장이 된 것이다.
당시 조선 유일의 수출산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광산과 인삼밭에서 나오는 세수는 모두 내장원에 귀속됐다. 내장원경이란 자리는 엄청난 규모의 황실 자산과 이권을 관리하는 대한제국 최고의 `노른자위 보직`이었다. 국가재정을 관리하는 관료가 된 그는 우리 역사상 최초로 화폐제도 도입을 기획하기도 했다. 도무지 사리사욕이라곤 없는 헌신적 인물로 전국 금광의 세무감독사가 되었고, 내장원경, 원사부, 검사총장 등 중임들을 맡아 지냈다. 
이 무렵은 임오군란이 일어난 때로 흥선 대원군과 명성황후가 서로 불편한 관계가 계속되어 대립각을 세우고 있을 때였다. 이용익은 민영익과 함께 이 사태를 수습하여 명성황후를 창덕궁에 돌아오게 하였다. 고종은 이 일로 하여 이용익을 군수와 부사 등의 관직을 주었다. 정계에 입성한 이용익은 고종에게 더 없이 소중한 충신이 되었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났다. 그가 군부대신으로 있을 때였다. 일본공사 하야시와 함께 일본 도쿄에 강제로 보내졌다. 이용익은 약 1년 간 일본의 교육제도와 문화를 시찰하고 귀국할 때는 사재 10만원을 들여 서적을 들여왔다.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보성관을 만들고 보성중학(지금의 고려대학교 전신)을 창립하였다. 
이용익은 군부의 중앙정계로 복귀했지만 을사늑약을 반대하여 신변에 위협을 느껴 망명길에 오르게 된다. 1905년 8월17일 한밤중에 고종이 하사한 금괴를 여비로 삼아 인천에서 중국인 목선을 타고 상하이로 가서 그곳에서 다시 배를 갈아타고 프랑스로 떠났다. 고종의 밀명으로 외국에 도움을 청하러 간 그가 프랑스를 경유해 간신히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했을 때, 일본에서 파견한 자객 세 명의 총격을 받고 중상을 입었다. 겨우 몸을 추슬러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나왔다가 1907년 1월20일에 사망했다. 
정치적으로는 반일에 앞장을 섰고, 러일전쟁 직후에는 일제에 의해 강제 압송돼 그곳에서 1년간 구금 생활을 한 것이다. 그가 남긴 유산은 33만원(현재 가치 약 300억원)이 입금된 통장이 전부였다. 그의 임종을 지키던 동지에게 통장을 건네며 유족에게 전해 달라고 했다. 
할아버지 이용익의 사망소식을 들은 손자 이종호는 블라디보스토크로 달려가서 조부의 시신을 수습해 고향인 함경북도 명천에서 장례를 치렀다. 장례를 마친 후 그는 조부의 임종을 지킨 지인으로부터 33만원이 입금된 통장을 건네받았다. 이듬해 이종호는 경성 제일은행에 지급을 청구했다. 은행은 이유 없이 예금지급을 계속해서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다. 거액의 예금을 노린 친일파의 조직적 방해공작이 시작됐던 것이다. 
독립운동가 이종호(李鍾浩.1885-1932)는 함북 명천 출생으로 대한제국 내장원경을 지낸 이용익의 손자이다. 독립 운동가이자 교육자인 이갑(李甲)이 창립한 서우학회와 그의 재정적 지원으로 설립한 한북흥학회를 합해 서북학회를 만들고 평의원이 되어 1만원을 기부하기도 하였다. 서북학회월보를 간행하고 유능한 청년들을 해외에 유학시켜 인재양성에 주력하였다. 
1906년에는 미국에서 귀국한 안창호와 이동녕, 이갑, 이승훈, 윤치호, 전덕기, 안태국, 조성환, 최광옥, 이동휘, 등과 함께 신민회를 조직하고 비밀리 민족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경성학교`를 설립하여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1907년에 보성학교(고려대학교의 전신)의 설립자인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보성학교의 제2대교주가 되었다. 당시 일제통감부는 학부를 통하여 보성학교를 예속화하려고 학교경비의 부족액을 기부하겠다는 회유책을 폈으나 이종호는 이를 단호히 거절하자 안중근사건 연루혐의로 안창호, 이갑 등과 함께 체포되기도 했다.  
1907년 1월 이준, 이동휘, 함경도유지들과 함께 함북흥학회를 조직하였고, 이어 이 학회에 속성사범과를 설치하여 소학교교원을 양성하였다. 1908년에 한북흥학회가 서우학회와 합동하여 서북학회로 개칭, 두 학회가 경영하던 학교도 통합되어 서북협성학교로 새 출발을 하여 이종호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그 밖에도 강화 보창학교와 청주 보성학교 등을 사재로 경영하고, 안창호를 도와 평양 대성학교의 설립에도 기여하였다. 그리고 인쇄소 보성사를 통해 서적과 교과서를 간행하여 전국의 각 학교에 무료로 배부함으로써 근대교육에 이바지했다. 국권을 상실하고 보성학교의 경영을 천도교로 인계하였다. 일제가 `105인사건`을 날조하여 독립 운동가들을 체포하고 있을 때 이갑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중국 청도로 망명하여 독립운동가 안창호, 유동열 등과 합류했다. 1910년 12월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이상설, 김립, 김도여 등과 함께 권업회를 조직, [권업신문]을 발행하였고 블라디보스톡의 한인교육을 위한 4개 처에 한민학교설립에도 공헌했다.  
그 뒤 상해로 갔다가 1917년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강제로 국내로 송환되어 고향인 명천에서 1년간 거주제한을 받기도 했다. 1918년에 상경하여 독립운동가 손병희가 제2대 교주로 있던 천도교에 이관된 [보성학교]재단을 다시 되돌려 받으려 했으나, 일본의 방해로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이용익, 그에게는 많은 오해가 따라붙었다. 독립협회로부터 국고금을 착복했다는 오해를 받았고, 사망 당시 남긴 33만원의 예금을 두고 그를 탐관오리로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주한 일본공사 하야시는 친러파이자 숙적인 그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고종에게 유일무이의 충신이었고, 개인적 욕심이 없는 인물이었다고 했다. 
당시 구한말의 대한제국은 바람 앞의 촛불이었다. 명문세가의 문벌과 척족들로 구성된 대신들이 하루가 다르게 외세의 앞잡이가 되어 가는 판에 고종은 미천해도 능력이 뛰어난 인재인물들을 중용하고 있었다. 이 중 끝까지 고종으로부터 능력을 인정받고 두각을 나타낸 사람들 중 한 사람이 이용익이다. 그는 여타 다른 외세보다 특히 일본을 등에 업고 난국을 돌파하려 했던 대신들과는 달리 일본을 경계하고 군사력 증강과 국외 중립을 통해 국권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던 사람이다.
장호원에 피신해 명성황후의 친정 조카인 민영익과 더불어 은밀히 편지를 주고받으며 청국 군대를 불러들여 대원군을 몰아내려고 할 때, 서울과 장호원 왕복 4백리 길을 하루 만에 오가며 편지 심부름을 도맡았다. 항간에는 그의 빠른 발걸음에 대해 축지법을 썼다는 설도 전해진다. 민비가 환궁한 후 출세가도를 달리기 시작하여  민비가 죽은 후에도 고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다. 이때부터 반일감정은 더욱 최고조에 달하게 되었다. 친러 성향에다 배일감정은 민비를 시해한 일본에 대한 극단적인 증오감이 더 많이 작용했을 것이다. 의료선교사로 조선에 들어와 7년 동안 서울주재 미국공사를 지내며 함경도 운산광업소를 내게 된 알렌은 1884년 그가 처음 이용익을 만났을 때를 그의 일기에 이용익은 민영익의 집에서 만난 인물로 적었다.
이용익이 러일전쟁 개전 직후 일종의 공수동맹인 한일의정서 조인에 적극 반대하다 일본에 강제로 끌려가 일본의 선진문물을 돌아보고, 귀국해서는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보성전문학교를 설립한 것이나, 을사조약 직전 고종의 밀명을 받고 비밀리에 출국하여 프랑스와 러시아에 원조를 요청하러 다니다 끝내 타국에서 숨을 거뒀지만 조국의 안위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던 것이다. 일본 압송 후에 귀국해서는 기울어져 가는 조국을 위해 후학 양성에 힘을 기울였고, 을사늑약 이후 독립운동을 위해 국외로 망명해 구국운동에 투신하다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그 생을 마감하게 된 그의 공로는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부유하게 살 수도 있었던 금광 채굴업자의 길을 과감히 버리고, 자신의 부와 능력을 나라를 위해 공헌한 것은 귀감이 되고도 남음이 있다. 고종황제의 최측근이었던 이용익이 나라가 망하기 전 은행에 맡겼던 33만원의 거금은 그가 죽고 통장을 물려받은 손자가 이를 찾으려 했으나 독립운동 자금으로 쓰일 것을 염려한 친일파와 총독부에 의해 공중분해 되고 말았다.                     
                                                             -계속-

시인 박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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