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도 (동남문화관광연구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기찰(譏察)은 범인을 체포하기 위해 조선시대에 설치한 검문소라 할 수 있다. 왕래하는 통행자를 검문하고 수상한 사람을 조사하여 범인을 체포하고, 상인들의 물품을 조사하여 부정한 거래를 단속하였다. 또한 범인을 체포하기 위해 수소문하고 염탐하기도 하였다. 이 일에 종사하는 관원을 기찰군관(譏察軍官) 또는 기찰포교(譏察捕校)라고 하였다.
 포도청(捕盜廳)은 조선 시대에, 범죄자를 잡거나 다스리는 일을 맡아보던 관아이다. 초기에는 임시직이었으나 이후 상설기구가 되었다. 한성부와 경기도를 좌우로 나누어 좌포도청과 우포도청을 두었다. 지금의 경찰청에 해당한다.
 『속대전』에 따른 좌포도청의 직제는 다음과 같으며, 우포도청의 직제 또한 `좌`를 `우로만 바꾸면 동일하다. 종2품 좌포도대장(左捕盜大將) 1인(경찰서장 총경급). 종6품 좌포도종사관(左捕盜從事官) 3인(서장 보좌 및 죄인 심문을 맡은 행정직 - 경찰간부 경정급). 포도군관(捕盜軍官) 42인(현장 수사나 순라를 맡음 - 경사 ~ 경감급). 종6품 좌포도부장(左捕盜部將) 4인(형사반장급). 포두(捕頭), 삼부리라고도 한다. 
 기찰군관(譏察軍官)은 탐정 수사를 맡은 포도군관. 기찰포교, 기교(譏校)라고도 한다. 무료부장(無料部將) 26인(품계가 없음 - 일반 형사급). 무료군관, 포교(捕校)라고도 한다. 가설부장(加設部將) 12인(정원 외에 더 둔 부장). 가설군관이라고도 한다. 서원(書員) 4인 - 중인들로 사무기록을 담당한 서기들이다. 포도군사(捕盜軍士) 다수는 소위 포졸(捕卒)이라고 한다.
 기찰포교가 상주하여 기찰을 행하는 곳을 기찰방(譏察坊)이라 부르는데, 일반적으로 그냥 기찰이라고 일컬었다. 부산에는 십휴정기찰(十休亭譏察)과 구법곡기찰(仇法谷譏察)이 있었다. 두 기찰은 행정구역 개편과 관련하여 양산과 관련이 있다.
 기찰 마을(부곡동)은 조선 시대 영남대로 황산도의 경유지로서 십휴정기찰이 있었다. 『동래부지(東萊府誌)』 관해조(官?條, 1740년)에 "양산군 성 밖에 있던 십휴정 기찰이 1680년에 동래 부사 조세환(趙世煥)에 의해 부의 북쪽 10리에 이건하였는데, 규모는 6칸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동래부지』에는 동래부 북면 부곡리로 『경상남도 동래군 가호안』에는 기찰동(1904년)으로 나타나며, 전씨(全氏) 1호, 김씨(金氏) 2호, 손씨(孫氏) 1호, 양씨(梁氏) 1호, 방씨(方氏) 1호, 이씨(李氏) 1호, 최씨(崔氏) 1호 등 8호가 거주하였고, 이 가운데 김씨가 1600년경 기찰 마을 입향조로 알려져 있다.
 1680년(숙종 6) 십휴정기찰(十休亭譏察)이 이전한 지역은 일찍이 조선 시대에 십휴정역원(十休亭驛院)이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람이나 물품의 왕래가 빈번한 곳이었다. 이 지역을 중심으로 운송되는 물품이나 사람들을 검문하는 곳이 십휴정기찰이었다.
 기찰 마을은 황산도(黃山道) 국도 변에 남북으로 길게 형성되어 웃기찰(지금 금정보건소 일대)과 아랫기찰(현 롯데 마트와 SK 아파트 일대)로 나누어져 있었다. 1940년경에는 35가구 정도가 거주하였으나 현재는 주거 밀집지로 변하여 옛길과 윤산 기슭의 단군 신당(檀君神堂) - 기찰 마을의 수호신으로 학 머리 형상의 명당지로 전하는 금정구 부곡 3동 산14번지에 있음 - 만이 흔적으로 남아 있다. 재미있는 것은 기찰이라는 지명에서 유래된 부산산성양조에서 만든 생탁인 기찰 막걸리가 현재 인기리에 판매되고 있다.
 『동래부지』 관해조(1740년)에 `구법곡 기찰은 4칸이며 동래부에서 서쪽으로 20리의 양산 땅에 있다[仇法谷 譏察 四間 府西二十里 梁山地]`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양산군지』(1986)에 `구법진 나루터는 기찰에서 잠상을 단속하기 위한 배를 정박시켰던 곳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기찰 마을은 강변 마을로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구법곡(仇法谷)은 의성산 동쪽 골짜기로 기찰이 설치된 곳은 지금의 덕성초등학교 일대이며, 이곳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하여 기찰 마을이 형성되었다. 구법곡의 기찰 마을은 현재 부산광역시 북구 덕천2동 302~314 번지 일대에 있던 자연 마을로 덕천천이 흘러 내려와 의성산 옛 성터 뒤쪽으로 이어지는 부근에 있었다. 기찰 마을이 속한 지역은 1906년 경상남도 양산군 좌이면에서 동래군 좌이면으로 개편되었다가, 1910년 부산부에 편입되었으며,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으로 동래군 구포면 덕천동이 되었다.
 조선 시대 부산의 동래부에서 타지로 나가기 위해서는 두 갈래 길이 있었는데, 하나는 동래에서 양산으로 나가는 길이었고, 다른 하나는 구포에서 낙동강을 건너 김해로 나가는 길이었다. 부산 지역은 옛날부터 일본과의 교류가 활발하던 곳으로, 1407년(태종 7년) 부산포 왜관 설치 이후 왜인들의 왕래가 빈번하였기 때문에 이 두 길목에 대한 검문이 불가피하게 되어 설치된 것이 기찰이었다. 동래에서 양산으로 가는 길에 설치된 것이 십휴정기찰이었고, 구포에서 낙동강을 건너 김해로 가는 길목에 설치된 것이 구법곡기찰이었다.
 조선 시대 금곡 동원진 수참에서 일본 국왕 사절과 교역꾼들이 정식 절차를 밟아 서울로 가기 위해 낙동강을 오르내릴 때 강 하구 지역에서 왜인과 밀무역을 하는 잠상(潛商)들이 날뛰어 이를 단속하기 위해 의성산 동쪽 구법곡 어귀에 기찰을 설치하면서 기찰 마을이 생겨났다.
 잠상은 법령으로 금하는 물건을 몰래 매매하는 장사, 또는 그러한 장사를 하는 사람을 말한다. 법령으로 금하는 물건을 몰래 매매할 경우 잠상률(潛商律)로 처벌되었다. 조선 시대의 잠상률에 의하면 왜관에서 인삼을 밀무역한 잠상은 모두 왜관 앞에서 참형에 처했고, 중국과 연접한 의주 등의 국경지역에서 밀무역한 잠상은 감사정배(減死定配 : 사형에 처할 만한 죄인을 죽이지 않고 지정한 곳으로 귀양 보냄)하고, 의주부윤도 파직하는 등의 엄벌에 처하였으며, 밀무역품은 모두 국가에서 몰수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이후 일본의 요청으로 두모포 왜관을 비롯하여 초량 왜관이 설치되면서 왜관을 찾아오는 왜인의 수가 증가함과 더불어 왜인과 동래부 지방민의 접촉이 빈번해지면서 밀수품을 단속하고 잠상을 엄금하기 위하여 검문소 기능을 하는 기찰의 필요성이 더욱 절실하게 되었다. 1740년(영조 16)에 편찬된 『동래부지(東萊府誌)』에 1715년(숙종 41) 기찰의 중창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18세기 이전에 설치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기찰이 있었던 동래와 구포는 행정구역이 개편되기 전 옛날에는 양산에 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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