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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술년 황금개띠 해, 금(金) 이야기(2)

과거 찬란했던 황금의 나라 신라

전 세계 금관 13개. 신라금관 7개. 금관가야 2개. 고구려 1개 

세계 金보유 순위는 104톤으로 세계 34위


현재 국내 금광은 전남 해남의 은산광산, 

충북 음성의 무극광산, 경북 봉화의 금정광산 등 8개정도.

대우조선해양의 자회사인 은산광산이 연간 금 215㎏을 생산.

은산광산에서 채굴되는 금의 양이 국내 생산량의 약 98%차지

 

원석, 덩이 금(金)
1500년 전의 신라금관

 황금의 나라 신라
 아랍의 10세기 사학자 알 마크디시(Al-Maqdisi)는 `신라인들은 집을 금실로 수놓은 천으로 단장을 하고, 밥을 먹을 때는 금으로 된 수저와 그릇을 사용한다.`고 했다. 지리학자인 알 이드리시는 1154년 `지리학 총서`에서 누구라도 신라에 들어가면 영구 정착하여 떠나지 않고, 신라 사람들은 개나 원숭이의 목테까지도 금으로 만든다고 전했다. 
 기마 유목민족이었던 스키타이 족은 인도와 유럽에 속했고 아랍어를 썼다. 이들은 여러 부족으로 된 연합체제로 황금을 숭배하였다. 스키타이족의 몽골계는 유라시아 대륙을 넘어 신라로 유입되어 황금문명을 신라에 전파했다. 신라는 3세기 중엽까지 금보다 구슬을 더 귀한 존재로 여겼다. 삼국지 동이전에는 삼한에서는 구슬을 옷에 장식하거나 목과 귀에 달기도 한다. 그러나 금과 은, 비단은 큰 보배로 여기지 않았다고 했다.
 銀나라 주왕이 식사를 하는데 상아 젓가락을 사용하고 있었다. 이를 본 기자(箕子)가 한탄하며 말했다. "상아 젓가락을 사용하기 시작했으니 필시 옥으로 만든 술잔을 사용하게 되고, 옥(玉)으로 만든 술잔을 사용했으니 먼 지방의 진귀하고 기이한 물건들을 사용하게 될 것이다. 거마와 궁실의 호화스러운 사치는 장차 이것으로 시작되어 나라가 무법천지로 변하게 되어, 이는 결코 막을 수 없는 일이 될 것이다." 
 머지않아 곧 주왕이 음탕하고 무도하게 되자 기자가 간언하였으나 주왕은 듣지 않았다. 그런 기자를 어떤 사람이 나라를 떠나라고 충고했다. 기자는 말했다. "신하가 군주를 위해 간언하는데 군주가 듣지 않는다고 떠나게 되면 군주의 악행을 더 부추기는 꼴이 되니, 차마 그렇게는 할 수 없다"며 상투를 풀어 산발하고 남의 집에 노예가 됐다. 그리고 후일 기자는 기자조선(箕子朝鮮)을 세웠다.
 이슬람제국 지리학자 이븐 쿠르다드비라는 845년 지리서 `왕국과 도로총람`에 `많은 무슬림이 한반도로 건너가 정착했다`고 썼다. 고려 기록에도 `현종 15년(1024년) 예성강 벽란도(당시 국제무역항)를 통해 들어온 대식국(아랍) 상인 100명이 왕에게 토산품을 바쳤다`는 내용이 있다. 
 고려요(謠) `쌍화점`의 `회회아비`는 아랍에서 몽골로 왔다가 다시 고려로 건너온 무슬림을 말한다. 쌍화점(雙花店ㆍ만두가게)에 만두 사러 갔더니 회회(回回)아비 내 손목을 쥐네. 소문이 퍼지면 새끼 광대 네 말이라 하리라….` 여기에 회회(回回)아비 는 이방인이다. 여자 손님에게 수작을 거는 노래가 유행할 정도로 고려는 이슬람제국과 인연이 깊었고, 신라도 이와 마찬가지로 삼국유사에 처용(處容)의 묘사는 영락없는 아랍인이다. 
 신라에는 황금이 많은 나라였다. 황금의 나라란 스페인 사람들이 대항해시대 때 아메리카 대륙에서 `황금의 땅`이라는 엘도라도를 찾으려 했다. 일본서기에서도 신라에는 눈부신 금은채색들이 많다고 썼다. 그리고 백년 후, 신라는 당시 금을 보물로 여겼던 고구려와 부여의 영향으로 황금문화를 꽃 피우게 되었다. 황금의 금력은 곧 국력으로 이어졌고 삼국을 통일하는데 원동력이 될 수 있었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 기록에는 헌강왕 때는 도성 안에 초가집이 보기 드물었고, 성안은 노래와 음악 소리가 밤낮으로 끊이지 않았다한다. 민가에서 조차 숯으로 밥을 짓거나 연기가 많이 나지 않는 사과나무를 땔감으로 썼고, 함부로 된 땔감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신라황금유물은 금관이 주를 이룬다. 1921년 일제강점기 때 많은 한국 문화재들이 일본으로 갔는데, 이것이 `오구라 컬렉션`이다. 대표적인 조선 문화재를 수집한 일본인 오구라 다케노스케의 한국문화재 수집품을 말한다. 금관총 유물은 서울 조선총독부 박물관으로 갔으나 다시 1923년 경주로 오게 되었다. 당시 일제는 유물들을 체계적으로 조사하고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신라시대의 금관들 중 현재 6개가 발굴되었는데, 교동의 고분, 금관총, 금령총, 서봉총, 황남대총 북분, 천마총에서 발굴되었다. 교동 금관은 본래 도굴꾼들이 교동의 고분에서 도굴했다. 도굴꾼들이 경찰에 체포되면서 압수당한 유물에 이 금관도 있었다. 교동 금관은 4세기의 금관으로 밝혀졌고 금관총, 금령총, 서봉총, 황남대총에서 발굴된 금관들은 5세기의 것이다. 그리고 천마총 금관은 6세기의 금관인 것으로 드러났다. 
 금관총은 봉분이 유실되어 그 위에 주막이 들어서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주막에서 우연히 금관이 발굴되었다. 현재 금관총은 봉분이 사라진 상태로 터만 남아있다.  
 그리고 5세기의 금령총도 봉분은 유실되어 터만 남아 있고, 지증왕 모후의 무덤인 서봉총도 터만 남아 있는 상태이다.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 때 천마총과 황남대총을 발굴한 무덤으로 지증왕의 무덤이고, 황남대총은 실성왕과 왕비의 무덤이었다. 
 신라 금관을 무덤에 부장품으로 넣는 문화는 지증왕의 아들 법흥왕 때 불교가 신라에 들어오면서 사라지고, 무덤 형태도 거대한 돌무지 덧널무덤에서 이 보다는 작은 규모의 무덤으로 변했다. 진덕여왕 때까지는 금관을 왕관으로 사용되었으나 이때 당나라의 의복을 도입하게 되면서 황룡포를 입고 관모를 쓰면서 금관은 더 이상 만들지 않았다.  
 고대의 금은 공예장식품과 제기와 불상제작에 쓰였고 외교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고려 공민왕 때는 금을 이용하여 금화를 주조하기도 하였으나 조선시대까지의 금은 주로 나라를 위해 쓰였다. 15세기부터 왕실의 왕권의 권위와 영원한 삶의 상징으로 금이 사용되었다. 조선개국 초부터 1429년(세종 11)까지 37년간, 1481년(성종 12)부터 1484년까지 4년간을 명나라에 해마다 금 150냥(兩)과 40냥씩을 조공으로 썼다.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까지 채금에 동원된 농민들의 노임에 금을 사용하게 되었는데, 1780년(정조 4)부터 1806년(순조 6)까지의 정책에서 사금채취 부역을 한 사람들에게 현지에서 채굴된 금을 품삯을 대신했다고한다. 이후부터는 금이 화폐의 기능을 가지게 되어 청나라와의 무역에 값진 수출품목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
 우리나라는 금 광산이 지역 대부분마다 있을 정도로 한반도 전역에 펼쳐져 있는 광산의 수는 4천개에 가까웠다고 한다. 우리나라 제1의 금 산출지는 평안북도 운산, 대유동, 창성구성, 신연, 의주 해주 등지에 금광산이 있었고 충청도와 강원도에도 크고 작은 금 광산이 많이 개발되었다. 
 이 밖에도 경기도의 삼보, 영중, 충청북도의 태창, 무극, 충청남도의 구봉, 임천, 강원도의 홍천, 옥계, 전라북도의 금구, 전라남도의 광양, 경상북도의 상주, 금정 등이 유명한 광산들이다. 북한보다 남한 쪽에는 금광맥이 많지만 함금률이 높고 소규모인 것이 특징이다
 지금까지 채굴된 지구상의 금의 양은 166,500톤 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 금을 다 모은다면 축구장 하나를 가득 채울 정도가 된다고 한다. 황금의 종주국인 우리나라는 지질학적으로 한반도 절반 이상이 화강암이다. 조선시대까지 우리나라는 세계3대 금 생산 지역이었다. 조선시대말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많은 량의 금이 채굴되어 미국과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신라시대는 월성에서 반경 50Km근방 소하천 지류에서도 사금을 손쉬운 방법으로 채취하였다. 마그마가 식을 때 생기는 금의 생성과정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대보 화강암과 인접한 우리나라가 지질시대인 선캄브리아대, 고생대, 중생대, 신생대로 나누어지는 과정에서 금은 화강암 속에 포함되었다는 것이다. 경주지방은 대보화강암과 불국사 화강암이 연결되어 있어 금이 집중되었기에 상대적으로 금이 흔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사금은 화강암 속에 포함되어 있는 금광맥이 풍화작용에 의하여 분해, 붕괴되어 모레와 함께 하천에 침전되어 있는 상태를 말한다. 영천의 상계천과 현상강 상류 개천 주변에 퇴적되어 흐르는 금모레인 사금은 돌보다 무거워서 맨 마지막에 가라앉아 특별한 기술이 없어도 쉽게 채취할 수 있다. 조선시대까지도 경남 창원, 영천, 성주, 봉화에서 많은 사금을 얻었다한다. 사금은 금광맥이 붕괴된 채 토사와 함께 잔류한 경우에는 토금이다.
 우리나라 금은 연성과 전성이 매우 뛰어나 길게 늘이거나 얇게 펼 수 있다. 연성은 아무리 늘이고 늘여도 끊어지지 않는 것을 말하고, 전성은 또 아무리 얇게 펴도 찢어지거나 뚫어지지 않는 금의 성질을 말한다. 가로, 세로, 높이가 모두 1인치인 정육면체의 금을 넓게 펴면 가로, 세로, 높이가 모두 10미터인 공간을 뒤덮을 수 있을 만큼 넓게 펴진다. 금은 0.0001mm까지 얇아지며 금 1그램으로 3000미터 이상의 금선도 제작이 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금은 어떠한 경우에도 녹이 슬지 않기 때문에 도금을 이용한 장신구 제작에 사용된다. 금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원소들보다 무거운 금속이다.
 무엇보다 현대문명의 최첨단을 사는 인류에게 금(金)은 장신구는 물론이지만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가치를 가진다. 치과, 전자제품 등에도 사용될 뿐만 아니라, 전자공학에서 부터 인쇄기판에도 금이 쓰인다. 실리콘(규소)을 입힌 반도체에도 쓰이고 지금 우리들 누구나 사용하는 핸드폰에도 금이 들어있다. 
 과학자들은 지각의 갈라진 틈에서 지표면으로 흘러나오는 액체와 기체가 퇴적되어 금이 생긴다고 설명한다. 암석에서 널리 발견되고 있고, 광맥, 퇴적층, 사광상에서도 발견된다. 하천 바닥에서 발견되는 사금 알갱이는 지표수나 홍수 때문에 금광맥에서 씻겨 온 것이다. 바닷물 속에도 금이 발견되는데, 100만 톤당 약 6g의 금이 들어 있다고 한다. 
 중세시대에는 인위적으로 황금을 만들기 위해 연금술을 연구하기도 했으나, 이제는 과학자들의 연구로 바닷물에서도 금을 채취할 수도 있게 되었다한다. 입자가속기를 이용한 방법으로 금을 생성할 수 있게 되었다하나 입자가속기로 생성되는 금의 양은 매우 적고 가속기를 운영하는데 드는 비용이 더 많아 경제성이 전혀 없다는 것. 상업에 쓰이는 금은 아직도 자연자원에서 얻는 것이라 금광업도 중요한 산업이지만 자연환경도 생각해 볼 일이다.

박정애 (시인)  webmaster@yangsa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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